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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민주공화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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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영토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왕국은 카탕가(샤바) 지역의 루바 왕국이었다.

루바 왕국은 16세기에 콩골로라는 이름의 한 무사가 카탕가 지역의 작은 추장령(酋長領)들을 정복하여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한 데서 비롯되었다(루바-룬다 제국). 서북쪽에는 많은 작은 추장령의 연합체인 쿠바(Kuba) 왕국이 있었는데, 18세기에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다(콩고 민주공화국 영토에 걸쳐 있던 콩고 왕국과 룬다 왕국에 대해서는 '앙골라' 항목 참조).

19세기 말 벨기에레오폴 2세가 헨리 스탠리의 콩고 강 탐험을 지원함으로써 유럽인의 중부 아프리카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레오폴 2세는 1884∼85년의 베를린 서아프리카 회의에서 유럽 열강들로부터 콩고 자유국이 독립국가로서 자신의 사유지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무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이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었다. 그러나 고무 채취에 동원한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야만적 행위가 폭로되면서 레오폴 2세는 유럽 국가들의 분노와 콩고 자유국을 포기하라는 거센 압력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1908년 이에 굴복했다. 그의 사유지였던 콩고 자유국은 폐지되고 '벨기에령 콩고'로서 벨기에 정부에 합병되었다.

1921년에는 유럽 문명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배척하는 예언적 종교 운동인 킴방구주의(Kimbanguism)가 태동해 주민들을 결집시켰다.

민족주의는 뒤늦게 나타나 서서히 성장해갔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투표권을 갖게 된 것도 1957년의 일이지만, 일단 민족주의 바람이 일자 민족주의는 극적으로 성장했다. 벨기에는 마침내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령 콩고의 독립에 동의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지도자인 파트리체 루뭄바 초대 총리가 영도한 신생 콩고공화국은 독립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독립한 지 2주일도 안 되어 군 장교와 경찰 간부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카탕가(지금의 샤바) 주는 분리를 선언했다.

콩고공화국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국제연합(UN) 평화유지군을 끌어들였으나, UN 평화유지군의 개입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UN 평화유지군은 특히 1961년 1월 17일 카탕가 분리주의 정권의 루뭄바 살해를 저지하지 않음으로써 비난을 받았다. UN 평화유지군은 1964년까지 주둔했지만, 그들이 떠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이어졌다.

국명을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바꾼 지 1년 만인 1965년 모부투 세세 세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좌에 올랐다(카사부부). 모부투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1967년경에는 카탕가 주의 반란이 가라앉았고, 1971년에는 국명이 자이르로 바뀌었다. 1977∼78년 카탕가 반군이 앙골라에서 샤바 주로 침입했지만 격퇴되었다. 냉전하에서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권좌를 유지했던 모부투는 냉전 종식 후 서방 국가들로부터 다당제와 권력 분배의 압력을 받아 1991년 다당제 선거를 실시했으며, 1997년 5월에는 카빌라가 이끄는 반군에게 패해 모로코로 망명했다.

모부투 정권하에서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경제적 실책과 정치적 부패는 이 나라의 경제 기반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콩고 민주공화국은 전세계에서 생활 수준이 가장 열악한 나라로 전락했다.

카빌라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국명을 자이르에서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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