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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보카치오

다른 표기 언어 보카치오 , Giovanni Bocca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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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13, 파리
사망 1375. 12. 21, 토스카나 체르탈도
국적 이탈리아

요약 데카메론의 작가. 페트라르카와 함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토대를 마련했고, 속어인 이탈리아어 문학을 고대 고전문학의 지위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데카메론의 작가.

ⓒ Raffaello Sanzio Morghen/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개요

〈데카메론 Decameron〉이라는 현세적 이야기의 작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페트라르카와 함께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토대를 마련했고, 속어인 이탈리아어 문학을 고대 고전문학의 위치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젊은시절

보카치오 디 켈리노(보카치노라고 함)라는 토스카나의 한 상인과 프랑스계인 듯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보카치오의 문학 취향에 반대하던 아버지는 1328년경 장사를 배우게 하려는 생각으로 아들을 나폴리에 보냈다. 그가 간 곳은 바르디가(家)의 한 사무실로 보이는데, 이 가문은 당시 돈을 대부하는 일로 나폴리 궁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궁정 기사도와 봉건주의의 화려함 속에 잔존해 있는 온갖 것뿐 아니라 상업세계의 귀족 사회를 경험하게 되었다. 또 교회법을 공부했고 궁정의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페트라르카의 친구들이나 그의 추종자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들을 통해 페트라르카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나폴리에서 보낸 이 기간은 피아메타라는 아가씨에게 사랑을 느꼈던 때로 그녀는 〈데카메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문학활동을 지배하고 있다.

〈데카메론〉에는 초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피아메타와 다소 비슷한 성격의 인물 피아메타가 나타난다. 보카치오의 작품을 통해 이 피아메타를 로베르토 왕의 사생아이자 아키노 백작의 아내인 실존인물 마리아로 보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더구나 마리아라는 인물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줄 기록상의 증거도 없다.

바르디가의 파산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그를 피렌체로 다시 불러들인 때는 1340년경이었다. 이리하여 생애에서 보호를 받던 시기는 막을 내리고 이후로는 어려움과 때때로 찾아오는 가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년 보카치오는 나폴리에서 이미 단시(短詩) 〈디아나의 사냥 La caccia di Diana〉과 5권으로 된 산문 〈일 필로콜로 Il filocolo〉(1336경), 8행의 짧은 영웅시로 트로일로스와 신의 없는 크리세이다의 이야기를 그린 〈일 필로스트라토 Il filostrato〉(1338경) 등의 문학작품을 완성했다(오타바 리마). 이 작품들에 나타나는 기사도와 사랑이라는 주제는 궁정사회에서 오랫동안 친숙한 주제였고 부르주아 계급뿐 아니라 하층 계급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초기 작품들은 이탈리아 밖에서도 곧바로 호응을 얻어 초서는 〈일 필로스트라토〉에서 영감을 얻어 〈트로일로스와 크리세이다 Troilus and Criseyde〉(뒤에 셰익스피어가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essida〉로 썼음)를 썼고 〈테세이다 Teseida〉를 본떠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에 나오는 〈기사 이야기〉를 썼다.

피렌체에서 보낸 시기와 〈데카메론〉

피렌체로 돌아온 뒤 10~12년 동안은 보카치오의 전성기였으며 〈데카메론〉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1341~45년에 쓴 작품으로 3행연구의 산문 〈아메토의 요정 이야기 Il ninfale d'Ameto〉, 3행연구의 짧은 노래 50편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우화시 〈사랑의 환상 L'amorosa visione〉(1342~43), 산문 〈성녀 피아메타에게 바치는 애가 Elegia di Madonna Fiammetta〉(1343~44), 8행의 영웅시 형식으로 요정 멘졸라에 대한 양치기 아프리코의 사랑을 그린 〈피에졸레의 요정 이야기 Il ninfale fiesolano〉(1344~45경)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계속 노력했으나 실패했으며 피렌체로 돌아온 뒤의 그의 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345~46년에는 라벤나에 있었으며, 1347년에는 포를리, 흑사병이 휩쓸었던 1348년 당시와 1349년에는 피렌체에 있었다. 오늘날 읽혀지는 형태로 〈데카메론〉을 쓴 시기는 1348~53년인 듯하다. 그 광범위한 영역과 삶의 희비극적 단면들로 인하여 이 작품은 당연히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체면에서는 가장 완벽한 이탈리아의 고전적 산문의 본보기이며 전유럽의 르네상스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메론〉은 10명의 젊은이(7명의 여자와 3명의 남자)가 1348년 흑사병이 강타한 피렌체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샘이 솟는 풍요로운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되는데 2주 동안 차례로 동료들을 이끌어갈 왕 또는 여왕이 되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고 산책·야외토론·춤·노래 등을 주관케 하며 특히 돌아가면서 이야기 자랑을 하게 했다. 이야기 자랑이 2주 가운데 10일 동안 계속되므로(나머지 시간은 개인적인 치장이나 종교적 시간을 위해 남겨둠), 이 책의 제목이 '10일 동안의 이야기', 즉 〈데카메론〉이 된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100편에 달한다. 더욱이 날마다 그날 이야기한 사람 가운데 1명이 부르는 춤곡(발라데)으로 이야기 대회를 끝맺는데, 이 노래들 가운데 보카치오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 몇 편이 들어 있다.

흑사병과 그것이 몰고온 도덕적·사회적 혼란이 장려하게 그려져 있는 첫부분의 음울한 격조는 종일토록 재치넘치는 논쟁을 하는 1일의 빛나는 생동감과, 2일과 3일의 모험 및 속임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4일째 되던 날에는 불행한 사랑 이야기들과 함께 우울한 분위기가 다시 감돌지만, 5일에는 고독의 메아리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나 처음에 쉽지 않게 흘러가던 사랑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함으로써 약간의 기분전환을 유도하고 있다.

6일은 1일의 명랑한 분위기를 다시 도입해 웃음·속임수·방종에 탐닉하는 희극적 악장인 7, 8, 9일에 대한 서곡 역할을 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10일에 이르면 전날의 모든 주제가 최고조에 이르고 불순물은 순수하게, 평범했던 것은 영웅적으로 변하게 된다. 보카치오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이 당시 만연하던 미사여구에서 벗어난 생동감 있고 빠른 전개와 긴장감이 넘치는 이야기체와 구어의 대가임을 보여주었다.

보카치오 작품의 집대성이라 할 〈데카메론〉의 주제·형식·취향 등은 기본적으로 중세적인 것이지만 주제와 형식을 다루고 있는 그의 정신은 최소한 중세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한 새로운 것이다.

〈데카메론〉에서 그는 처음으로 운명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며, 가능하다면 운명을 개척하기까지 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선과 운명이라는 이 뚜렷한 이원론은 르네상스적 감성과 사고에 뿌리를 둔 것이다. 〈데카메론〉에 따르면, 진실로 고귀해지기 위해서 인간은 운명을 있는 그대로 달게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기대에 어긋나거나 비극적인 것이 될지라도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현세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욕구를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제한해야 하고 절대적인 것은 깨끗이 포기해야 한다.

이와같이 보카치오는 인간의 능력과, 인간이 빠져나갈 수 없는 한계를 모두 강조했다. 〈데카메론〉의 가장 음탕한 문구에서도 나타나듯이 경박성을 함축하고 있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긍정과 정신적 실재에 대한 인식은 현대 비평이 밝혀낸 보카치오 문학의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에게 더이상 외설적인 흉내꾼 또는 관능적인 냉소가라는 평가를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데카메론〉을 쓰고 있던 시기로 추정되는 1350년 피렌체는 그를 로마냐 귀족들을 방문하는 사절로, 1351년에는 시의원이자 티롤 지방의 바이에른 공작 루이를 방문하는 사절로, 1354년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의 방문 사절로 임명했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원숙기

1350년 피렌체에서 이루어진 페트라르카와의 첫 만남은 공식적 명예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이 만남은 보카치오의 문학활동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페트라르카가 그의 생애 거의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던 작품 〈데카메론〉 이후 보카치오는 〈일 코르바초 Il Corbaccio〉(보카치오를 버린 한 미망인에 대한 풍자), 단테에 관해 쓴 후기 작품, 드물게 쓴 서정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대신 라틴어에 눈을 돌려 상상력을 발휘해 시를 창작하는 것보다는 인본주의적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백과사전적 성격의 〈이교 신들의 계보에 대하여 De genealogia deorum gentilium〉는 구성면에서는 중세적이나 사상면에서는 인문주의적인 작품으로서 페트라르카를 만난 바로 그해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수정·보완되었다. 한편 당대의 사건들에 대한 우의적인 목가(짧은 목가시)를 모은 〈목가시 Bucolicum carmen〉(1351~66)는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단시에서 보여주었던 고전적 본보기들을 따르고 있다.

유명한 여성들의 전기를 모은 〈뛰어난 여성들에 대하여 De claris mulieribus〉(1360~74)는 페트라르카의 〈유명인들에 대하여 De viris illustribus〉를 보충한 작품이라 할 수 있고, 아주 운이 좋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재난에 대한 글 〈유명인들의 운명에 대하여 De casibus virorum illustrium〉(1355~74)도 페트라르카의 〈각자의 운명 극복에 대하여 De remediis utriusque fortunae〉에서 영향을 받았다. 끝으로 고전의 지명을 모은 〈산·숲·샘·호수·강·늪 또는 습지와 바다의 이름에 대하여 De montibus, silvis, fontibus, lacubus, fluminibus, stagnis seu paludibus, et de nominibus maris〉(1355~74)가 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와의 만남이 보카치오의 문학에 변화를 초래한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아마 몸이 너무 일찍 쇠약해진 것과 사랑에 대한 실망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전에는 늘 여성과 사랑을 찬미하는 작품을 썼던 보카치오가 갑자기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한 〈코르바초 Corbaccio〉를 썼으며 그뒤 재능을 딴 곳으로 돌리게 된 점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더욱이 종교적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듯한 조짐도 있었다. 페트라르카는, 1362년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사 피에트로 페트로네가 임종하면서 속세의 학문을 버리도록 권고하기 위해 조아키노 치아니라는 수사를 보카치오에게 보낸 일을 묘사했는데, 그때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가 작품들을 태워 없애버리고 서재를 팔아버리려는 것을 막기도 했다.

또한 1360년 이미 보카치오는 성당에서 목자로서 영혼을 치유하는 임무를 맡았음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종교적 금욕생활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보다 여러 해 전에 소품을 맡기도 했는데 이는 단지 처음에는 성직록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듯하다.

피렌체에서 보카치오가 사귄 이들은 초기 인문주의의 중추로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가운데에서도 레온치오 필라토는 보카치오가 1360~62년에 거처를 마련해주었으며 스투디오(피렌체의 옛 대학)에서 그리스어 강사로 임명되도록 도왔던 사람이다.

그의 라틴어 번역으로 인해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는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 학문을 연구하는 데 첫걸음이 되는 호메로스의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마르티알리스·아풀레이우스·세네카·오비디우스 등과 특히 타티투스의 라틴어 고전 원문의 재발견은 보카치오의 탄성을 자아냈고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카치오는 이탈리아 시와 바로 이전의 선배들, 특히 단테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점은 페트라르카와 그를 구별짓는 특징의 하나이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생애 vita di Dante Alighieri〉 또는〈단테를 찬미하는 소논문 Trattatello in laude di Dante〉과 이에 대한 2편의 요약판은 그가 단테에 대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만년

이러한 모든 연구는 궁핍함과 때로는 극도의 빈곤 속에서 이루어졌고, 수입은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옮겨 써서 벌어들이는 게 전부였다.

나폴리 여왕 요안나의 최고 고문으로 있던 피렌체의 은행가이자 정치가인 니콜로 아치아이우올리의 초대로 1362년 희망을 품고 나폴리에 갔으나 실망만 안고 피렌체로 되돌아왔으며 그후 1363년에는 체르탈도로 갔다. 1365년에 아비뇽, 1367년에는 로마로 교황 우르바노 5세를 방문하는 사절로 2차례 파견되었다. 1370~71년에 또다시 나폴리로 파견되었으나 1362년 방문할 당시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3년 10월 피렌체에 있는 산스테파노디바디아 교회에서 단테의 〈신곡(神曲) Divina commedia〉을 대중에게 강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강의에 추가된 주해서의 개정판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나 〈지옥편 Inferno〉의 17장에서 중단되어 있는데, 이때는 1374년초 건강이 악화되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단테에 대한 그의 강의가 비난을 받고 있어 낙심하고 있을 무렵이다. 1374년 7월 페트라르카의 죽음은 보카치오에게 또 하나의 비탄을 안겨주어 체르탈도에서 다시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그곳에서 생애를 마감하고 산티미켈레에자코포 교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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