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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또 1차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뒤 번창하는 신왕국(BC 1567~1085)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개화기가 도래했다.
신전·사당·암벽무덤·명문비석 등이 나일 강 계곡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 건립되었다. 웅장한 피라미드는 왕권의 유력한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도굴꾼들의 확실한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왕국시대에는 왕실무덤의 도굴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닮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테베의 궁벽한 골짜기에 무덤을 한데 모아놓았다. 그곳의 이른바 '왕들의 계곡'에는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어 아무런 외부 구조물 없이 다만 무덤입구의 암벽표면에만 표시를 새겨놓았다.
또한 암벽무덤은 귀족계급에서도 흔히 매장실로 사용했다. 그 대부분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공간을 이용하여 마스타바 무덤의 복잡한 방들이 하는 역할을 모두 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일부는 상당한 건축적 노력을 기울여 지은 것도 있었다. 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회랑들은 종종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는데 일부는 바위를 공들여 깎아 기둥을 만드는 등 정식으로 지은 것이지만 일부는 대충 깎아 만든 것이다. 회랑 내부에는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었다. 때로는 정면 현관에 주랑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겨 웅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신전건축은 크게 예배용 신전과 장례용 신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일상적인 예배의 대상인 신상을 모셔놓은 곳이고, 후자는 죽은 왕들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전의 내부시설과 웅장한 크기는 제사장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전건축은 거대한 현관과 열주가 늘어서 있는 마당, 많은 기둥이 있는 회랑, 감실, 여러 예배당을 포함했다. 신전 내부의 깊숙한 곳은 파라오와 대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기둥과 받침대의 디자인은 종려라든가 파피루스 같은 식물모양을 본떴으며 벽도 식물무늬로 장식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과 군주의 조상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다. 주신전 건물 바깥으로는 호수가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물이 있어 제례에 쓰는 물을 공급했다. 후기에는 탄생실을 두어 왕의 거룩한 출생을 기리기도 했다. 부속건물을 망라한 전체 신전은 진흙벽돌로 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배용 신전은 오랜 세기에 걸쳐 테베에 세워진 대성전들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형식을 이룩했다.
그 가운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자면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착공한 룩소르 신전이다. 위대한 건축가인 람세스 2세가 지은 가장 볼만한 대건축물로는 아부심벨 신전을 들 수 있다. 천연의 암석을 파서 만든 이 신전은 전반적으로 보통 이집트 신전의 설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전 정면은 거대한 좌상이 자리잡았으며 기둥 있는 회랑이 2개 잇닿아 현관으로 통하고 감실에는 람세스 자신의 조상을 포함해 4개의 신상이 비치되어 있다.
또한 제21·22왕조의 왕들이 아몬 레 신에게 봉헌한 삼각주지대 타니스의 대신전에 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신전은 거대한 조상과 10여 개의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석재의 대부분을 이집트의 다른 신전들에서 차용해왔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건축물들을 집대성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신전은 예배용 신전일 뿐 아니라 경내에 매장되는 왕들을 위한 장례용 신전이기도 했다. 그밖에 볼 만한 예배용 신전의 유적으로는 카르나크·아비도스·아마르나 등지의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신왕국시대의 장례용 신전은 대부분 서부 테베의 변두리 사막지대를 따라 건축되었다(장제전). 1가지 예외를 꼽는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으로서, 다이르알바리의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 부근에 있다.
관례에 따라 설계된 장례용 신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이었던 것 같다. 이는 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석영암으로 만든 2개의 멤논의 거상으로 미루어 판단한 것이다. 신전의 뜰과 회랑의 유적에서 발견된 이 거상들을 비롯한 그밖의 왕실조각상들은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웅장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신전의 설계와 석재의 대부분은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신전인 라메세움을 짓는 데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장례용 신전 외벽의 벽장식은 주로 왕들의 군사활동을 다루었으며 내부의 장면은 주로 제례적인 의의를 갖는 것들이었다.
회화·조각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들은 왕실과 그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해 만든 다양한 사치품들의 전형이다.
회화는 이 시기에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잡았고 공예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제18왕조에 이르러 회화와 조각은 우아미와 세련미를 보였으며 고전적인 표현규범을 좀더 자유롭게 적용했다. 인물상은 가볍고 부드럽게 처리되었고 세부묘사는 더욱 정밀해졌다. 부조미술의 전통은 테베에서 부활되었고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신전의 조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왕실부조는 테베와 사카라의 개인 무덤에 있는 것과 쌍벽을 이룬다.
이집트 회화는 테베에 있는 귀족들의 무덤장식에서 최고수준에 달했다. 장식매체의 특성과 외견상 더욱 확대된 예술적 자유로 오락적인 내용을 담은 작은 세밀화가 표준화되었다. 메나와 나크트의 작은 무덤들에는 그와 같은 재미있는 소품들이 가득하다. 레크미레 같은 큰 무덤들의 회화는 좀더 형식적이지만 이 역시 이례적으로 세부묘사가 풍부하다. 테베와 텔엘아마르나의 왕궁과 주택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천장화의 단편들은 풀밭과 정원을 배경으로 한 상류계급 일상생활의 일면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 시기에 부각된 아마르나 양식은 아크나톤 왕(아멘호테프 4세)의 치세와 더불어 등장했다.
이 양식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왕실가문의 성원들도 비공식적인 일상생활 속의 모습으로 철저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비록 람세스 2세 치하에서 거상(巨橡) 조각이 절정에 달하고 뒤이어 아크나톤 치하에서 관능적 사실주의가 번창했지만 이집트 조각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대 이후 왕실 인물상은 대체로 인습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때때로 조각가가 예외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사자를 데리고 리비아인 포로를 옆에 끌고 가는 람세스 6세의 특이한 인물상(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같은 것이 그렇다. 말기 왕조들의 왕실 조각과 민간 조각에서는 복고풍이 특히 두드러진다. 제25왕조의 누비아 왕들의 인물상은 제12왕조의 왕실 조각을 많이 본뜬 것 같은 야성적인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중왕국과 제18왕조 시대 조각상의 유형이 부활되었으며 많은 걸작이 제작되었다. 테베 시장 몬템하트의 조각상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풍부한 다양성과 뛰어난 기법, 때로는 획기적인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후기시대 작품들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조각적 특성을 고찰할 때 대부분의 이집트 조각이 갖는 1차적 목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집트 조각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 앞에 재현하거나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대신전의 신들 앞에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문에 조각상은 단지 물리적 재현일 뿐만 아니라 거기 부합하는 문서를 담는 도구이기도 했고 그리하여 아름답게 조각된 표면에 어울리지 않게 문서를 새겨넣기도 했던 것이다(종교예술).
공예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도기는 예술성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도기는 대부분이 암포라 형태의 단순한 물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18·19왕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무늬가 채색된 고급 기물이 등장했다. 파이앙스(광택이 있는 석영가루의 합성물)가 전반적으로 도기를 대신할 조형재료로 등장해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작은 동물상과 인물상 등의 재료로 널리 쓰였다. 가장 두드러진 예로 중왕국시대의 푸른 광택이 나는 하마상이 있다. 특히 후기시대에 파이앙스로 만든 부적과 작은 신상이 크게 발달했다.
그밖에 다양한 색상의 파이앙스 타일도 널리 쓰였다. 유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선왕조시대 초기부터 유약의 형태로 알려졌으나 제18왕조 때까지는 독립적인 재료로 쓰이지 않았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유리는 항상 사치의 상징으로서 부적·구슬·상감·술잔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이집트 금속공예의 장인들은 구리·청동·금을 많이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용기는 금속덩어리(잉고트)를 나무로 된 모루 위에 놓고 두들겨 부풀려서 만들었다. 뒤에는 주물이 지배적으로 쓰였다. 대형 청동상 주물은 신왕국 말기에 제25왕조 때까지 절정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걸작으로는 카로마마상(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이 여인상의 유례없이 우아한 조형미는 겉옷의 깃털무늬와 정교한 꽃무늬, 옷깃을 이루는 금은 상감에 의해 더 한층 돋보인다.
이집트에서는 금이 은보다 구하기가 쉬웠다. 금은 이집트의 장신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금세공품). 그것은 상감과 칠보세공·목걸이·구슬 등에 쓰였다. 보석은 쓰이지 않았지만 홍옥수, 자수정, 석류석, 붉은색과 노란색 벽옥, 청색 유리, 장석, 터키옥, 마노 등 다양한 준(準)보석이 널리 쓰였다. 제18왕조 초기의 아호테프 여왕과 함께 매장된 대량의 장신구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가운데는 디자인이 특이한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특히 사슬 모양의 금목걸이가 걸작이다.
제18왕조 시대의 것으로 멋진 장신구가 많이 전해오지만 어느 것도 투탕카멘의 장신구(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는 못미친다. 이 대량의 수집품은 금세공과 보석세공사들의 모든 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나무와 상아, 동물의 뼈를 사용한 조각은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높은 수준의 기예를 보이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화장용구와 그밖의 장식물들이 특히 볼만하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왕의 매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식탁·평걸상·침대·옷장 등 조각과 상감을 새겨넣은 수많은 가구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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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신왕국시대 이집트 미술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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