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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학살의 비보로 분노한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대하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발표된 단발령은 거의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1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2월 아관파천 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했다.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유생들이었으며, 병사는 농민전쟁을 경험한 농민이나 소작농민이 대부분이었다. 을미의병의 당면 목표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친일내각을 퇴진시킨 다음 일본군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을미의병은 1896년 여름 거의 해산했는데, 이는 농번기를 맞아 전투조직을 유지킬 수 없었고, 국왕의 선유에 저항할 논리도 궁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학살의 비보로 분노하고 있던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명성황후의 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즉시 '토역소'(討逆疏) 등을 올려 폐위에 반대함은 물론 나아가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하는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나타냈다.
1895년 8월 22일 서울에 창의고시문이 나붙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그의 문인 수백 명이 유생대회인 향음례(鄕飮禮)를 하는 중에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방법으로 공론을 모았다. 또한 10월 11일 충청북도 보은에서 문석봉(文錫鳳)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보은 장터에 격문을 붙이고 회덕으로 진격하여 관아를 습격, 무장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발표된 단발령은 거의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1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2월 아관파천 후 친러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했는데, 당시 유생들은 친러내각도 종전의 친일내각과 다를 바 없는 정권으로 인식했다. 의병의 공격대상은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고 친일내각을 받드는 지방관리, 의병에 대항하는 관군이나 일본군, 그리고 일본인 거류지와 그들의 시설물이었다. 을미의병의 지도층은 유생들이었으며, 병사는 포수를 비롯해 농민전쟁을 경험한 농민이나 소작농민이 대부분이었다.
유인석을 비롯한 지도부의 유생들은 이항로계열의 척사이념을 바탕으로 했으며, 지도부와 병사 사이에 신분적·정치적 갈등이 일정하게 존재했다. 을미의병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발령이 발표되자 서울에 와 있던 김하락·구연영·조성학 등의 젊은 유생들은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포군(砲軍) 100여 명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1월 중순 이천·여주·안산·남양·죽산·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합쳐 박준영을 대장으로 김하락을 군수 겸 도지휘로 하는 2,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여, 이천과 광주에서 일본수비대를 격파하고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기세가 높아진 연합의병진은 서울진격을 목표로 2월 25일 남한산성을 공략·점령했으나, 3월 중순 일부 의병들이 관군에 매수됨에 따라, 김하락 의진이 안동으로 내려가 서울진격은 무산되었다. 이항로의 문인 이소응·이진응을 중심으로 한 춘천유생들은 400여 명을 포섭하여 춘천관찰부를 기습·점령하고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했다. 강릉에서는 1월 30일 민용호를 대장으로 평창·영월·정선 지방의 포수로 구성된 의병이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영동9군창의소(嶺東九郡倡義所)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면서 기세를 높였다.
충청도 홍주에서는 김복한·안병찬 등이 기의하여 일대를 장악했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그의 문인 서상렬·이필희와 기의하여 호좌창의진을 편성한 후 강원도의 일부 의병병력과 합류하여 단양군수·청평군수를 처단하고 충주부를 점거했다. 이때 유인석은 영월에서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보내 의병봉기를 호소했다. 경상도 진주에서는 안의출신의 유생 노응규가 1896년 1월 7일 기의하여 19일 진주성을 점령한 후, 부산진격중 일본군에 패전했다.
산청에서는 곽종석 등 200여 명의 유생들이 의병진을 편성한 후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기의하여 대구로 진격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했다. 전라도에서는 나주의 기우만 등이 광주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을 편성하여 위세를 떨쳤다.
을미의병의 격문들에 나타난 당면 목표는 단발령을 철폐하고 친일내각을 퇴진시킨 다음 일본군을 축출하는 것이었으나, 대개 군수의 굴복을 받거나 추방하고 단발령을 차단한 뒤, 동헌(東軒)이나 향교에 머물렀다가 해산했으며, 단발령을 강행하려던 춘천·충주·안동·강릉·예천·영덕·청풍·단양에서는 관찰사·군수·경무관 등 현직관리를 처단했다.
지역적으로 보면 동학농민혁명이 격렬했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 전투의병이 없었고 의진의 형성자체가 미미했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민력이 쇠진했거나, 유생과 농민의 대립이 극단적이어서 의진 형성을 위한 양자의 제휴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체적으로 을미의병은 1896년 여름 거의 해산했는데, 이는 농번기를 맞아 전투조직을 유지시켜 나갈 수 없었고, 국왕의 선유(宣諭)에 저항할 논리도 궁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의 지도부는 해산 뒤에 정미의병으로 재기하거나, 의병활동을 중단하고 은거, 계몽주의자로 전향, 관도에 천거되는 경우 등 각기의 학통과 의병경험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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