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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수립 초기와 1920년대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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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초기와 1920년대에 진행되었던 외교 내용. '국제연맹에 대한 활동강화'를 방침으로 삼고 처음 계획한 외교 활동은 파리 강화회의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성립되지 못했고, 1920년부터는 외국의 외교적 지원을 받는 것과 연대를 맺는 것 등으로 방침을 바꾸었으나 이번에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1922년부터 임시정부는 세계 각국에 대한 친교를 강화하는 것으로 그 목표를 다시 한 번 바꾸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19년 4월 수립된 임시정부는 초창기에는 독립전쟁을 독립군단체에 거의 일임하고 외교활동에 전념했기 때문에 1919년 11월에 공포된 임시관제에서 비서국·외사국(外事局)·통상국의 3국 중 외사국이 핵심이었으며 예산의 69.2%가 외교항목에 배당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헌장 7조에서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이라고 규정하여 당시 외교의 당면 목적이 국제연맹의 가입에 있음을 보여준다.

임시정부는 1919년 5월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그중 외교부문에서는 '국제연맹에 대한 활동강화'가 첫째로 되어 있으며, 1919년 7월에는 파리와 워싱턴에 대한 외교강화, 김규식을 외무국장 겸 주(駐) 파리 위원으로 임명하여 임시정부의 정식대표로 외교활동을 하도록 할 것, 서재필(徐載弼)을 공식대표로 인정, 외교원의 증가, 외국인의 고용 등 외교활동 강화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김규식은 파리에 주 파리 위원회 사무소를 열고 한국독립문제를 외국에 알렸으나 강화회의에는 참석이 거부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국제연맹 가입 등을 목표로 한 외교활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0년 세계열강의 외교적 지원 획득, 대한민국의 자주독립능력선전, 신흥국가와의 연대강화 등으로 외교정책의 목표를 변경했다. 1921년 11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9개국이 미국 워싱턴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군비축소문제와 태평양지역에 대한 세계 정세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자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 한국특파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외교로써 국제회의나 세계열강으로부터 한국독립을 보장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922년 외교정책의 목표를 '세계각국에 대한 친교강화'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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