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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9. 7. 12, 캐나다 캐나다웨스트(지금의 온타리오) 본드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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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9. 12. 29, 잉글랜드 옥스퍼드 |
국적 | 캐나다 |
요약 캐나다·미국·영국에서 진료하고 강의했으며, 그의 저서 〈의학의 원칙과 실제〉는 주요한 의학 교과서였다. 1873년 그는 그때까지 혈액 속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소체가 사실상 3번째 종류의 혈구라는 것을 밝혔는데, 이는 나중에 혈소판이라고 명명되었다. 1888년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의 첫 의학교수로 초빙되어 그곳에서 만난 의사들과 함께 현대 서양의학 임상교육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오슬러 결절(특정한 심장감염 질환에서 손에 나타나는 붉고 압통이 있는 종창), 오슬러-바케병이라고 알려진 혈액질환, 랑뒤-오슬러-베버병(피부와 점막의 혈관 침습으로 코피가 자주 나는 유전성질환) 등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는 뛰어난 학자이자 문사로서 퇴역 군의관 에거턴 요릭 데이비스라는 필명으로 감탄할 만한 의학오락물을 몇 편 쓰기도 했다.
캐나다·미국·영국에서 진료하고 강의했으며, 그의 저서 〈의학의 원칙과 실제 The Principles and Practice of Medicine〉(1892)는 주요한 교과서였다.
오슬러는 임상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의학교육의 구성과 교과과정을 전환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11년 준남작작위를 받았다(전문교육). 윌리엄 오슬러는 성공회 선교사로 캐나다에 간 페더스톤 오슬러 목사와 부인 엘렌의 9명의 자녀 중 막내였다. 그는 아버지처럼 교회를 위해 일할 예정이었으나 학교에서 〈종교의학 Religio Medici〉을 읽고는 자연사에 빠져들었다.
토론토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양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교회는 자신이 갈 길이 아니라고 결정하고 1868년 토론토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후 다시 맥길로 옮겨서 1872년 의사자격을 받은 다음 2년 동안 유럽의 연구소들을 방문했는데, 의학교육에서 실험생리학을 부각시켰던 존 버든 샌더슨의 생리학 연구실이 있는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주로 머물렀다.
1873년 오슬러는 그때까지 혈액 속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소체(小體)가 사실상 3번째 종류의 혈구라는 것을 밝혔는데, 이는 나중에 혈소판이라고 명명되었다. 이전에도 관찰된 적이 있었지만, 오슬러가 비로소 이 소체를 완전히 연구했다. 오슬러는 캐나다로 돌아와 둔다스에서 일반진료를 시작했으며, 곧 맥길대학교 의학연구소의 강사가 되었고 1875년 이곳의 교수가 되었다.
1년 후 몬트리올 종합병원의 병리학자가 되었고, 1878년 이 병원에서 의사가 되었다. 맥길대학교에서 그는 생리학·병리학·의학을 가르쳤다. 그의 연구는 대부분 해부실에서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에 있던 1884년 필라델피아대학교의 임상의학과 과장으로 초청받았는데, 동전던지기를 해서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의사협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1888년 오슬러는 볼티모어에 새로 생긴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의 첫 의학교수로 초청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병리학과장 윌리엄 H. 웰치, 산부인과학과장 하워드 켈리, 외과학과장 윌리엄 S. 홀스테드를 만났다.
이들 4명은 임상교육의 구성과 교과과정을 전환시켜 존스홉킨스대학교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과대학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이 병상의 환자들을 연구하여 결과를 '병동장'에게 제출하도록 했으며, 또한 문제를 실험실로 가져가 해결하도록 격려했다. 최종적으로 전문가들은 학생들과 환자들을 위해 공개 강좌 수업을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의 지식을 모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 전역에 전파된 임상교육의 틀이 만들어졌다.
오슬러는 의학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병원장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그 대학의 학장이 오슬러가 큰 백화점을 경영했던 경험을 고려하여 맡긴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이러한 방식이 미국 전역의 대부분의 의학연구소로 전파되었다. 처음 4년 동안 존스홉킨스대학교에는 학생이 1명도 없어서 오슬러는 그 시간을 〈의학의 원칙과 실제 The Principles and Practice of Medicine〉의 집필에 활용했고 1892년 출판했다.
같은 해 필라델피아대학교 재직당시 수술동료였던 이의 미망인이자 폴 리비어의 증손녀인 그레이스 그로스와 결혼했다. 오슬러가 쓴 교과서는 명료하고 포괄적이었으며 재미있고도 학문적이었다. 이 책은 곧 당대에 가장 널리 퍼진 교과서가 되었고, 오슬러만큼 우수하지는 못했지만 편집자가 바뀌어가며 계속 발행되었다. 이 교과서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1897년 여름, 존 록펠러가 자신의 박애사업에 대해 조언해달라고 고용한 F. T. 게이츠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록펠러에게 그의 재단을 의학연구분야로 방향을 돌리게 설득하여 뉴욕에 록펠러 의학연구소를 세웠던 것이다.
1904년 영국에 머무는 동안, 오슬러는 옥스퍼드대학교의 흠정(欽定)의학 교수직에 존 버든 샌더슨 경 후임으로 초청받았다.
그때 오슬러는 오랫동안 진료와 강의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아온 터였다. 그의 아내는 미국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수락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를 쳤고, 오슬러는 이를 수락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흠정직은 왕이 임명하는 것으로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 자격이 있으나 오슬러는 캐나다 국적을 계속 간직했다. 1905년 가을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의 연구원(평생 펠로)이 되어 평위원회의 회원이 되었고 보들레이안 도서관의 관장이 되었다.
옥스퍼드에서 주 1회만 강의하고 진료도 적게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에 쏟았다. 그의 도서관은 가장 훌륭한 도서관의 하나로 그가 죽은 후에 맥길대학교로 옮겨 특별하게 보관되었다. 또한 고전협회(Classical Association)의 회장으로 선출됨으로써 학식을 인정받았다. 그는 의학업무에도 활동적이어서 영국 및 아일랜드 의사협회를 결성하고, 〈계간 의학 저널 Quarterly Journal of Medicine〉을 창간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84년에는 런던 왕립의사협회의 회원으로, 1898년에는 런던 왕립학회의 펠로로 선출되었다.
그와 아내는 사람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어서 사람들은 그의 집을 '열린 마음의 집'이라고 했다.
오슬러는 강의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의 주제는 의학사와 문학으로서 일부는 모아서 출판되기도 했다. 그 스스로 의사들에게 가장 유익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Aequanimitas〉는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오슬러는 익살스런 재치가 있어서 퇴역한 미국 군의관 대위 에거턴 요릭 데이비스라는 필명으로 감탄할 만한 의학오락물을 몇 편 쓰기도 했다.
의학용어에서 오슬러의 이름은 오슬러 결절(특정한 심장감염 질환에서 손에 나타나는 붉고 압통이 있는 종창), 오슬러-바케병이라고 알려진 혈액질환, 랑뒤-오슬러-베버병(피부와 점막의 혈관 침습으로 코피가 자주 나는 유전성질환) 등에 영원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자 오슬러도 활기를 잃어 1919년 폐렴으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1920년 1월 1일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대성당에서 예배로 치러졌다. 오슬러 부인은 1928년 죽었는데 그녀의 유골은 오슬러의 유골과 함께 맥길대학교의 오슬러 도서관에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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