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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일본 혼슈 중앙보다 약간 서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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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8,824,394명 (2020년 추계) |
면적 | 1,905.14㎢ |
언어 | 일본어 |
대륙 | 아시아 |
국가 | 일본 |
요약
오사카 부는 혼슈 중앙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한다. 긴키 지방에서 제일 넓은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나라 현, 북동쪽으로는 교토 부, 북서쪽으로는 효고 현, 남쪽으로는 와카야마 현에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오사카 만을 바라보면서 세토나이카이를 통해 주고쿠, 시고쿠, 규슈와 연결되어 있다.
예로부터 긴키 지방 수륙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면적은 일본의 도도부현 중 가장 협소하며, 인구는 도쿄 다음으로 많다. 행정상 부청이 소재하는 오사카 시를 비롯해 33시 9정 1촌으로 나뉜다.
오사카 부[大阪府]는 혼슈[本州] 중앙보다 약간 서쪽에 위치한다. 긴키 지방에서 제일 넓은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나라 현[奈良縣], 북동쪽으로는 교토 부[京都府], 북서쪽으로는 효고 현[兵庫縣], 남쪽으로는 와카야마 현[和歌山縣]에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오사카 만을 바라보면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해 주고쿠[中國]·시고쿠[四國]·규슈[九州]와 연결되어 있다.
예로부터 긴키 지방 수륙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면적은 도도부 현(都道府縣) 중 가장 협소하며, 인구는 도쿄[東京] 다음으로 많다. 행정상 부청이 소재하는 오사카 시를 비롯해 33시(市) 9정(町) 1촌(村)으로 나뉜다. 오사카 시의 주위에는 사카이[堺], 히가시오사카[東大阪], 도쿄나카[豊中], 히라카타[枚方]·다카쓰키[高槻]·스이타[吹田], 야오[八尾]·네야가와[寢屋川]·이바라기[茨木] 등의 위성도시가 오사카 시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국철과 사철을 따라 분포한다.
부의 인구추이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전인 1941년에는 482만 명을 헤아렸는데, 종전 직후인 1945년에는 280만 명으로 격감했다. 그후 경제부흥과 함께 인구도 현저히 증가하여 1965년에는 315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를 고비로 해마다 감소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비해 오사카 시 근교지역은 주택단지 등의 활발한 개발에 따라 인구도 급증하여 최근 5년 동안에 오사카 시에서 20~40㎞ 범위 내에 있는 여러 도시는 15~30%의 인구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1965년부터 실시된 긴키권 정비법 사업계획에 따라 교통망의 정비가 추진됨에 따라 오사카 부 산하 일원의 지역개발은 한층 진전되어 새로운 오사카 부로 변모하고 있다.
자연환경
지형
오사카 지방의 지형은 오사카 평야와 오사카 만이 커다란 요지(凹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북부·동부·남부로 산지가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오사카 만에 아와지 섬[淡路島]이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분지상 지형을 이룬다. 이 분지는 세토우치[瀨戶內] 함몰지대로 예전에는 고[古]오사카 만이라고 불리던 해저 분지였다. 그 동반부에는 그후 요도가와 강[淀川]과 야마토 강[大和川] 등의 토사퇴적에 의해 오사카 평야가 형성되었다.
주변은 북부의 호쿠세쓰 산지[北攝山地], 동부의 이코마 산지[生駒山地], 곤고산지[金剛山地], 남부의 이즈미 산맥[和泉山脈]으로 둘러싸여 오사카 평야와는 단층에 의해 경계를 이룬다. 최고봉은 곤고 산(1,112m)이며, 산꼭대기 일대에는 너도밤나무 원시림이 무성하다. 지질은 이즈미 사암(砂岩)이며 북서쪽 산록에서는 묘석·등롱(燈籠)에 사용되는 이즈미 청석(靑石)을 산출한다. 이러한 산지는 경승지를 이루며, 산록 부근은 사적이 풍부하여 곤고이쿠마 국정공원과 메이지[明治]의 모리미노오[森箕面]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사카 평야는 그 산록에 분포하는 구릉이나 대지 및 충적지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북부의 센리[千里] 구릉, 동부의 히라카타 구릉, 가타노[交野] 대지, 남부에 펼쳐진 가센[河泉] 구릉군(群) 등이 있다. 구릉과 대지상에는 선사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계곡에는 오래된 저수지가 많다.
최근에는 구릉과 대지의 개발이 활발하여 대규모 주택지와 상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오사카 평야의 대부분을 이루는 충적지는 이런 구릉과 대지에 둘러싸인 중심부에 있으며, 요도 강과 야마토 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 충적평야는 낮고 평평하며 비옥한 경작지를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농업이 이루어져왔으며, 오사카·사카이 등의 도시가 발달한 곳이다.
기후
오사카 지방의 기후는 온난하며 연평균기온은 15.5℃로서 기온의 계절차가 심하다. 연평균강수량은 1,359㎜로, 겨울에는 강수량이 적고 초여름의 장마철과 초가을의 태풍기에는 비가 많으나 한여름에는 비교적 강수량이 적다. 바람은 지형적으로 서쪽이 트인 관계로 대체로 서풍이 탁월하며 특히 겨울철에는 강한 서풍이 분다.
이러한 기온과 강수량의 특색은 오사카뿐아니라 세토나이카이 연안 각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세토우치형[瀨戶內型] 기후인데, 오사카는 그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이 외의 세토우치형 기후의 특색으로 아사나기[朝風]·유나기[夕風]라는 현상이 있다. 즉 해연풍과 육연풍이 교대하는 아침과 저녁에 무풍상태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때의 무더위는 견디기 어렵다. 또 요도가와 강과 같은 하천은 과거 곧잘 범람하여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었는데, 메이지 이후의 치수공사로 지금은 그 피해가 거의 없어졌다.
역사
나니와[難波]의 기원
선토기문화(先土器文化)에서 조몬[繩文]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요도가와 강과 야마토 강의 퇴적작용으로 그 하구에 충적평야가 형성됨에 따라 농경이 발전했다.
오사카 만에는 '나니와의 야소지마[八十島]'라 불리는 히메 섬[比賣島]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생겼다. 4세기말부터 5세기에 걸쳐 가와치[河內]를 중심으로 강력한 왕조가 있었음을 이곳 고분과 유적은 말해주고 있다. 또 5, 6세기에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을 받드는 중요한 지반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 전후에 대륙의 선진문화와 기술이 대량 유입된 듯하며, 귀화인에 의한 국토개발도 활발했다.
나니와 진(津)은 이러한 대륙문물 전래의 문호와 외국선박이 드나드는 항구가 되었다.
조카마치[城下町]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시야마혼간 사[石山本願寺] 자리에 30여 개 구니[國]에 명령하여 장대한 오사카 성(城)을 구축했고, 이쿠다마[生玉]·다마쓰쿠리[玉造]·와타나베[渡邊]를 중심시가지로 개발함과 동시에 센바[船場]·시마노우치[島ノ內] 등 바다와 인접한 지역도 정비했으며 새로이 하천과 운하를 개수·굴착하여 성곽도시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1619년 바쿠후[幕府]는 오사카를 직할 영지화했으며, 그후 요도가와 강의 치수를 위해 아지 강[安治川]을 개통함으로써 오사카는 하항(河港)으로 발달하여 '물의 도시'라 불렸다. 이른바 '출선(出船) 1,000척 입선(入船) 1,000척', '팔백팔교(八百八橋)'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발달되었다.
경제 중심지로서의 오사카
오사카는 1600~1700년경에 경제시장으로서의 우위성을 대강 확립했다.
여러 한[藩]은 오사카에 구라야시키[藏屋數 : 창고저택]를 두고 한의 조공미를 판매했으며, 그러한 쌀 인환권(引換券)의 매매소 및 도지마[堂島] 쌀시장으로서 시가 발전하게 되었다. 쌀 외에 소금·밀(密)·종이·쪽과 같은 특산물도 판매되었는데, 이런 것을 구라모노[藏物]라고 했다. 오사카는 모든 물품의 표준시세를 결정하는 도매상으로 부상했고, 또 구라모노를 담보로 하여 다이묘[大名]들은 돈을 빌었다. 전국 물자의 집산시장으로서 도매상·중개 등 유통기구가 발달한 오사카의 상품집산은 해상교통에 의한 외국과의 거래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편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환전업(換錢業)이 많이 생겨, 화폐의 환전뿐아니라 예금·발행어음도 일찍부터 행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근세문화사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바쿠후 말기의 오사카
근세 후기가 되자 상품의 유통계통은 점차 혼란해져 해체의 길을 걸었다.
지방 물주들이 오사카의 도매상을 멀리하여 오사카 이외의 고장에서 판매를 했고, 여러 한도 점차 전매방법을 택하여 직접 오사카에 가지고 와서 불하하거나 직접 수요지로 운송하기도 했다. 경제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약화됨에 따라 오사카에서는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봉기하여, 가택을 파괴하고 쌀을 약탈하여 부당한 가격으로 강매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고, 특히 신정부가 긴메[銀目 : 에도 시대에 은이나 은화를 계량하는 단위의 명목] 폐지와 같은 낡은 경제제도를 철폐하는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오사카의 상업 및 금융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고요킨[御用金 : 바쿠후가 임시비용에 충당하기 위해 호상(豪商)에게 과한 차입금]의 중압, 구라야시키의 폐지, 동업조합의 해체에 따른 부호상인의 도산 등으로 도쿠가와[德川]시대에 그토록 번영했던 오사카는 어떻게 상업자본을 근대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사카 개항과 전후의 신생 오사카
오사카의 근대화를 촉진시키고 나아가 해외로의 발전에 대한 실마리를 푼 것은 개항이었다.
1868년 7월 15일 세관을 설치하고 외인거류지를 둠으로써 해외교역이 시작되었다. 특히 청일·러일 전쟁의 승리로 그 시장은 중국대륙과 아시아 제국으로 확대되었다. 또 근대적인 육상교통도 현저히 발달되어 5대 사철(私鐵 : 민영철도)이 부설되었다.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에 호황을 가져왔고 오사카도 상공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후 만주사변(1931)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체되었던 경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특히 일본 경제가 고도의 성장기를 맞은 1955년부터 오사카의 지역개발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임해공업지역의 조성, 상공업단지의 조성이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급증하는 인구대책으로 뉴타운과 같은 대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이들을 연결하는 환상선(環狀線), 방사선 도로계획, 나아가 오사카 항과 국제공항의 확장 등의 교통체제 정비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반면 공장 급증에 따른 대기오염·수질오염 등의 공해문제와 자동차 급증에 따른 교통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산업과 사회
개요
오사카 부는 오사카 시역(市域)을 중핵지구로 하여 기타오사카[北大阪]지역, 히가시오사카 지역, 미나미가와치[南河內]지역, 센슈[泉州]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타오사카의 북부 지역은 경지가 적은 농촌·산촌으로 예전부터 임업·숯·밤·양잠 등이 주로 발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억제 채소 재배와 낙농·양계 등 다각적인 농업경영을 하고 있다. 관광개발도 추진되어 1966년 모리 미노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부는 주택지로 개발되어 일본에서 손꼽히는 집단주택지역으로서 새로운 도시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히가시오사카 지역은 이코마 산지의 산록 일대와 요도가와 강, 야마토 강의 토사퇴적으로 이루어진 낮고 평평한 가와치 평야지역이다. 쌀 외에 연근재배의 중심지이며, 그밖에 채소·화훼 재배가 행해지고 포도재배로도 유명하다. 미나미가와치 지역은 곤고 산지와 이즈미 산지에서 흘러나오는 이시카와 강[石川]에 의해 형성된 하곡평야로 예로부터 문화의 중심지였으므로 고분과 옛 사사(社寺)가 많다.
최근에는 오사카 시내로의 통근이 가능해짐에 따라 택지화가 진척되고 있으며, 농업도 귤·배·가지·오이·토마토·콩을 중심으로 한 근교농업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센슈 지역은 이즈미 산맥과 여기에 이어진 구릉 및 홍적대지와 해안평야로 이루어진다. 이곳을 흐르는 하천은 짧고 수량이 적어 관개용 저수지가 많이 축조되었다. 농작물로는 쌀 외에 양파 재배가 활발하며 귤·튤립·수선화도 재배한다. 또한 젖소 사육이 성하여 낙농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위의 4개 지역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오사카 시 지역이다.
오사카의 중심기능은 지금도 상업이며 그중에서도 도매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상업과 아울러 공업도 성하여 섬유·식료품·잡화 등의 경공업 외에 금속·기계·화학 등의 중공업도 발달함으로써 종합적인 공업지역이 되었다.
상공업 도시 오사카
오사카는 도쿄와 더불어 일본의 2대 상업 중심지로, 상업 발달은 근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한때 오사카의 봉건적 상업은 쇠퇴했으나 오사카 항 개항과 근대공업 발흥에 따라 근대상업으로 전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섬유가·전기기구가·피혁가·공작기계가·자동차부품가 등 전문상가가 탄생했다. 이와 함께 금융업의 근대화도 이루어져 과거의 환전상은 증권회사나 은행으로 전환하여 그 일대에 금융가를 형성했다. 또 교외 전차 터미널 주위에는 백화점과 상점 등이 밀집하여 번화가를 이루었다.
오사카 항은 1868년 개항되었는데, 원래는 수심이 낮아 네덜란드인 기사를 초청하여 축항계획을 세운 뒤 제1·2차 공사가 추진된 결과 고베[神戶]·요코하마[橫浜]와 나란히 일본 3대 무역항이 되었다. 이와 같은 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한 것이 오사카의 근대공업이다. 주요공업지역으로는 요도가와 강 공업지역, 조토[城東] 공업지역, 임해공업지역이 있다. 오사카 부의 공장수(1988)는 7만 5,777개, 종업원은 93만 9,000명, 총출하액은 22조 2,591억 원에 달한다. 업종별로 보면 출하액은 전기기기(14.1%)·금속제품·화학공업·철공업 순이다.
상공업이 발달한 오사카 시내에는 주택과 상공업이 함께 산재해 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는 소음과 대기오염 문제가 심각하다. 전후에는 공영·공단이 경영하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봉급생활자들의 주택단지가 되었다. 우에마치[上町] 대지는 오사카 역사의 발자취를 간직한 곳이며 사적이나 문화시설도 많다. 부근에는 관공서·방송국·박물관 및 오사카 성(城) 공원이 있다. 또 미술관과 학교 및 병원 시설이 많은 지역이다.
대체적인 오사카 번화가의 특색을 들면 음식점이 많은 것인데, 독특한 고급요리에서부터 대중을 위한 값싼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이른바 '오사카는 먹어서 망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창하다. 오사카 시의 교통은 오사카 역(우메다[梅田])이 중심이며 도카이도[東海島] 본선을 비롯해 오사카 환상선, 사쿠라지마선[桜島線]이 지나는 외에 호쿠리쿠[北陸]·산요[山陽]·산인[山陰]·시고쿠·규슈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명실공히 서일본 교통의 거점이다.
최근에는 신(新)오사카 역이 새로운 거점이 되어 도카이도 신칸센[新幹線]·산요신칸센이 발착한다. 지하철은 1933년 우메다-신사이바시[八齊橋]를 연결하는 것을 시초로 1984년 현재 6호선까지 건설되어 있으며, 총연장은 90.9㎞이다. 도로는 우메다 신도(新道)에 마련된 도로원표(道路元標)를 기점으로 국도 1호선이 도쿄로, 국도 2호선이 시모노세키[下關]로 통하며, 또 한신[阪神] 국도 2호선과 욧카이치[四日市]로 국도 25호선, 와카야마로 국도 26호선이 연결된다.
최근에는 한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교통이 한결 편리해졌다.
한신 공업지대
한신 공업지대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해 오사카만 연안의 여러 공업도시와 내륙에 있는 공업도시를 통틀어 말한다.
이 공업지대의 성립은 에도[江戶]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오사카는 정동(精銅)·유지(油脂)·피혁·다시마 제조를 비롯해 총포대장간과 향·양조업, 면화가공 직물업에 의한 공장제 공업과 수공업이 발달했다. 이런 전통산업은 일부 소멸되었으나 대부분 현 공업의 초석이 되었다. 1882년에는 민영 오사카방적회사가 설립된 것을 효시로 방적업이 이 고장의 기간산업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화학공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타격을 받아 저조했다.
1955년경부터 이곳의 경제회복을 목표로 사카이·센호쿠[泉北] 임해지역의 매립지에 공단을 조성하여 그곳에 제철·기계·석유화학·전력 등의 공장을 유치했다. 지금은 게이힌[京浜] 공업지대와 어깨를 겨루는 종합적인 공업지대로 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 공업지대는 종래의 섬유를 비롯한 식품·잡화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기간을 이룬 데 비해 최근에는 중화학공업이 급속히 신장하여 종합공업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공업내용을 보면 중화학공업 중에서도 금속공업 특히 주물과 같은 2차 제품이 많으며, 기계공업에서는 전기기구와 같은 경기계 기구제품, 화학공업에서는 의약품 등 경화학공업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규모도 일부 대자본 계열에 속하는 대규모 공장을 제외하고는 중소·영세 공장이 대부분이어서 경기의 호황과 불황에 영향을 받기 쉽다.
주택도시의 발달
오사카가 급격히 근대적 상업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1894)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1896년에는 인구 50만 명을 넘게 되어 시가지가 주변으로 확장됨에 따라 제1차 시역 확장이 이루어져 면적이 56㎢, 인구가 75만 8,000명으로 증대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 공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1905년에는 100만 명, 1916년에는 15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오사카 시가지의 발전은 당초에는 자연적인 주택화에 주로 의존했으나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는 비지적 주택지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촉진한 것이 사철(私鐵)이다.
그후 계속적인 인구증가로 1940년에는 325만 2,000명에 달해 최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사철의 발달로 비지적 주택화가 촉진된 결과 위성도시가 차례로 탄생했다. 오사카 북쪽 교외에 있는 도요나카[豊中] 시는 오사카의 '베드타운'으로 알려진 전형적인 주택도시이다. 이 주택지는 센리[千里] 구릉 서쪽의 도요나카 단구(段丘)를 이용하여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오사카로 통근하는 사람들은 잘 발달한 여러 개의 전철노선을 이용한다.
오사카 긴키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사카는 오사카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왔으나, 반면 몇몇 새로운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 오사카 시로의 지나친 인구·공장의 집중과 그에 따른 교통마비를 비롯한 대기오염·소음·지반 침하 등의 도시 공해 발생, 공업지대 발전에 따른 수자원·동력자원 등의 부족, 대도시 주변의 자연환경 파괴와 문화재 보호 등의 긴급한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사카 시·부의 행정구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오사카와 경제적 관계가 깊은 인접 부(府)·현(縣), 나아가 긴키 지방 전역에 걸친 협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행정적인 장벽을 넘어 '긴키는 하나'라는 이념하에 긴키 2부 6현이 공동으로 1960년부터 '긴키권 개발촉진협의회'를 결성했고, 1963년에는 '긴키권 정비법'을 제정했다. 긴키권 정비계획의 목적은 앞서 말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목적달성을 위하여 긴키권 내를 4개의 구역, 즉 게이한신[京阪神]의 기성도시구역, 그곳에 인접한 근교정비구역, 나아가 그 외연의 도시개발구역, 보전구역 등으로 지정하여 각 구역의 특성에 따라 정비·개발을 추진해가려는 것이다. 그 내용은 기성도시구역에서는 모든 건설을 억제하고 교외로 이전하는 것을 권장하는 한편, 도심부의 재개발을 도모하여 이곳에 중추관리기관을 집적시켜 도시기능의 고도화를 도모한다.
근교정비구역에서는 농업적지는 되도록이면 녹지대로 보전함과 동시에 계획적인 공업단지와 주택단지, 학원지구를 만들어 모시(母市)의 일부 기능을 분담하도록 한다. 도시개발구역에서는 근교정비구역의 외변지역에 적합한 근대공업을 유치하며, 아울러 개발이 뒤떨어진 배후지를 부흥시켜 지역격차 시정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보전구역은 옛 문화·사적 및 국립공원 등의 관광지를 골라 문화재 보호와 자연환경 보전을 도모하여 인근 주민의 여가선용을 위한 장소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긴키권 정비법이 제정되자 오늘날까지 오사카 지방에서는 그 법에 따른 많은 계획이 진전되어 새로운 변모를 보이고 있다. 기성도시구역인 오사카 시에서는 그 도심부의 시가지 재개발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건축의 고도화가 추진되어 머천다이즈 마트 빌딩(지상 22층, 지하 4층), 미쓰비시[三菱] 빌딩과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도매기능·본사관리기능·금융기능 등의 집적이 한층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 반면 새 공장의 설립은 거의 볼 수 없으며, 최근에는 오히려 감소경향마저 나타난다. 근교정비구역에서는 공장진출이 현저하다. 대학시설도 교외의 구릉이나 대지 등 자연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인구분포에 크게 반영되어 오사카 시와 주변지역 간에 이른바 인구의 도넛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 오사카 부민의 인구유동이 크게 늘어났는데, 그 대부분이 봉급생활자이다. 이 통근자와 물자수송에는 교통망의 정비가 기반이 된다. 도로정비와 자동차도로 부설도 추진되었다. 긴키권의 중핵을 이루는 한신 공업지대에서는 최근 사카이·센보쿠[泉北] 임해공업지역에서 공업용수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전에 요도가와 강에 의존해온 용수를 비와 호[琵琶湖]에서 직접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 비와 호 종합개발사업도 게이한신 지역의 각 부·현 간의 협력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요시노구마노[吉野熊野] 종합개발에 의한 수력전기를 게이한신 지역의 동력원으로서 한층 크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도 후쿠이 현[福井縣] 미하마[美浜]와 다카하마[高浜]에 건설된 원자력발전소가 긴키권의 경제상에 주는 의의는 클 것이다.
오사카의 재개발은 '긴키는 하나'라는 이념 하에 긴키권 전역의 정비개발과 일체가 될 때 비로소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 부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수는 1992년 12월의 외무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가 18만 7,389명으로, 이중 남자가 9만 1,558명이고, 여자가 9만 5,831명이다. 직업별로 볼 때 사무직이 1만 2,211명(남자 1만 230명, 여자 1,981명), 제조업이 1만 655명(남자 9,873명, 여자 782명), 상업이 6,413명(남자 5,535명, 여자 878명)이며, 그밖에 서비스업, 요식·숙박업, 기술직, 전문직, 예술 및 종교, 농림수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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