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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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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07, 로마
사망 1457. 8. 1,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철학자·문예비평가.
(라). Laurentius Vallensis.

중세 전통을 공격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의 견해를 앞서 보여주었다(르네상스)

아버지는 로마 교황청 소속의 법학자였으며 가족은 피아첸차에서 이주해왔다.

24세까지 대부분의 시절을 로마에서 지내면서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했다. 1430년 교황청 서기직에 응모했다가 실패한 뒤 5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파비아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동안 참된 선(善)의 본질에 관한 대화체 작품 〈쾌락에 대하여 De voluptate〉(1978 영역)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의 통념과 달리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옹호함으로써 독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에피쿠로스는 덕(德)을 쌓음으로써 고통을 이기고 분별있는 쾌락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 현자의 길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발라는 이성에 의한 감정의 통제와 검소한 삶을 주장한 스토아주의에는 비판을 퍼부었다. 더 큰 파문은 14세기의 저명한 법학자 바르톨루스가 사용한 조잡한 라틴어 문체를 공격한 일이었다. 급기야 파비아대학 법학교수들이 들고 일어나자 발라는 대학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밀라노와 제네바를 전전하다가 1435년 나폴리의 왕 아라곤가(家)의 알폰소 밑에서 왕실 서기관 및 역사가로 자리를 잡았다.

그뒤 13년 동안 알폰소 왕실에 봉직했는데, 30대였던 이 기간에 가장 중요한 저술들을 썼다. 〈증서 Declamatio〉(1440,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으로 1922년 영역)에서 그는 익명의 저자가 쓴 '증서'에 나타난 조잡한 라틴어 문체를 비난하고 감정 결과 그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 씌어진 것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교황 유게니우스 4세와 전쟁중이던 알폰소 왕이 이탈리아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청의 권리 주장을 반박하는 데 정치적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이 저서는 1517년 독일에서 처음 나왔는데, 이 해는 루터가 교황청 정책을 비판하면서 교회에 관한 95개 명제를 공개적으로 제시한 해이기도 하다. 알폰소 왕실에서 봉직하는 동안 발라는 다른 저서를 계속 발표했다. 짧은 대화체 작품인 〈자유의지에 대하여 De libero arbitrio〉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를 조화하려 한 스토아 철학자 보에티우스(480~524/525)를 비판했다.

또 〈변증론 논쟁 Dialecticae disputationes〉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9개의 범주를 3개(명사·형용사·동사에 각기 상응하는 실체·성질·능동)로 줄이는 한편 '실체'·'본성' 등 스콜라 철학의 여러 전문용어가 조잡하다고 비판했다(아리스토텔레스주의). 그는 전문 철학자들의 용어보다는 일상 언어를 선호했다.

〈변증론 논쟁〉은 논리학에 대한 수사학자의 공격이었으며 철학 문제를 언어 문제로 환원하려는 시도였다. 〈라틴어의 우아함에 대하여 Elegantiae linguae Latinae〉(1471)는 고대 이래 최초의 라틴어 교과서였으며 그후 유럽 전역에서 문법학교 교재로 널리 애용되기에 이르렀다.

발라는 문법마저도 논쟁거리로 만들 수 있었으며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의 산문을 비판함으로써 동시대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20세에 쓴 최초의 책에서도 키케로보다는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가 더 훌륭한 문필가였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그는 또 알폰소 왕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왕 치하의 역사를 쓰기도 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대포나 의회 등과 같이 로마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들을 고전 라틴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따위의 언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의 거룩함'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에 알폰소 왕실의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파치오로부터 〈비난 Invective〉에서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에 〈파치오에 대한 맞비난〉이라는 대화체의 글로 응수함으로써 왕이 즐겨 조언을 구하던 궁정 인문주의자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이 글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역사서에 포함된 여러 오류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발렌시스는 또 다른 논쟁에 휩쓸렸는데, 이번에는 〈사도신경〉이 12명의 사도에 의해 씌어졌다는 점을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신학 논쟁이었다.

결국 성직자들의 집단적 비난을 받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자리에서 에피쿠로스를 옹호한 죄,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비판한 죄 등을 포함하여 8가지 이단죄를 선고받았는데 알폰소 왕이 친히 개입했기 때문에 화형을 면할 수 있었다.

1448년 유게니우스 4세의 후계자이자 인문주의를 후원하던 니콜라우스 5세가 그를 교황청 비서로 임명하자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직책은 1455년이 되어서야 니콜라우스의 후계자에 의해 비준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며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40대에 쓴 최후의 주요저서 〈다양한 언어로 씌어진 사본을 통해 본 신약성서 주해 In Novum Testamentum ex diversorum utriusque linguae codicum collatione adnotationes〉는 유명한 스콜라 학자였던 베사리온과 쿠자의 니콜라우스 두 추기경의 격려와 충고로 완성되었다. 1505년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 못한 이 〈다양한 언어로 씌어진 사본을 통해 본 신약성서 주해〉는 인문주의 문헌학의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예상대로 그는 라틴어 성서 번역의 권위자 성 히에로니무스에 대한 불경죄로 공격받았으며, 〈다양한 언어로 씌어진 사본을 통해 본 신약성서 주해〉는 반(反)종교개혁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작성한 금서 목록 〈명부〉에 들어 있었다.

이밖에 그는 수많은 그리스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미 나폴리 시대 초기에 이솝 우화를 번역했으며, 교황 니콜라우스의 지시를 받아 역사가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쉴 새 없는 저술 작업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각종 논쟁에 뛰어들었다. 피렌체의 유명한 인문주의자 포조 브라치올리니가 자신의 〈라틴어의 우아함에 대하여〉를 비난하자 〈포조 비판 Antidoti in Poggium〉으로 응수했다.

두 스콜라 학자는 여기서 최악의 사태를 연출하며 상대방에 대해 각기 무식장이이고 야만인이며 표절자라는 등 심지어 그보다 심한 모욕적 언사로 서로 헐뜯었다. 리비우스가 로마 역사를 쓰는 과정에서 저지른 오류를 자신이 지적한 데 대해 볼로냐의 명사 베네데토 모란디가 불손한 짓이라고 공격하자 그는 지지 않고 〈모란디 반박 Confutatio in Morandum〉으로 맞섰다.

대화체 단편 〈수도사 서약에 대하여 De professione religiosorum〉에서는 청빈·정결·순명에 대한 서약을 비판하면서, 중요한 것은 '서약이 아니라 헌신'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장면은 그의 도발적·논쟁적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1457년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일에 로마의 산타마리아소프라미네르바 성당은 그를 초빙하여 도미니쿠스회 수사들 앞에서 성 토마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신학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 아퀴나스의 논리학에 대한 관심과 문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찬양 연설을 대신해버렸다. 그가 성직자였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직자 유급제를 주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로마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았다. 사상적 투쟁가가 넘쳐나던 그 시기에 호전적이었던 발라에게는 적도 쉽게 생겨났다. 직업적 이단자였던 그로서는 권위와 정통성에 대한 비판가의 역할이 제격이었다.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를 비교함으로써 세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지켜본 한 동료가 말한 대로 그가 글을 쓰는 목적은 오직 대중의 기존 신념을 흔들어놓는 일뿐이었다. 이 점에서 그가 성공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50년 이상이 지난 뒤 루터와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시대에도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기존 관념에 대한 많은 비판은 현학적이고 궤변이 강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그는 '무례'·'억측'·'몰염치'·'신성모독' 등의 이유로 혐오 대상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통이 신성하게 유지되던 시대에 그의 신성모독은 중요한 사상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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