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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85. 10. 28, 네덜란드 레르담 근처 아쿠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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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38. 5. 6, 스페인령 네덜란드 플랑드르 이프르(지금의 벨기에) |
국적 | 플랑드르 |
요약
얀센주의로 알려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대표적 저서로 1640년 그의 친구들이 출간한 <아우구스티노>가 있다. 이 책은 164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이단 선고를 받았지만 얀센주의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1602년 신학공부를 위해 네덜란드 루뱅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신학자 미킬 바이우스의 교리를 배웠다. 그는 바이우스에게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를 철저히 연구한 후 <아우구스티노>를 썼다. 1642년의 대칙서에서 교황은 교황청의 인가 없이 출간되었으며 이미 이단 선고를 받은 바이우스의 교리에 기초를 둔 <아우구스티노>를 금서로 선포했다. 그러나 포르루아얄 수녀원에서는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고,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얀센주의자들이 왕국의 통일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고, 1710년 수녀원을 없앴다.
개요
얀센주의로 알려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성서 해설서와 소책자들을 썼다. 대표적 저서로 1640년 그의 친구들이 출간한 〈아우구스티노 Augustinus〉가 있다. 이 책은 1642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이단 선고를 받았지만 얀센주의 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교육
얀센은 1602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있는 루뱅대학교에 들어갔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관례에 따라 얀센은 이름을 코르넬리우스 얀세니우스라는 라틴어명으로 고쳤다. 스승인 자크 얀손은 1589년 루뱅대학교에서 작고한 신학자 미킬 바이우스(미셸 드 베)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바이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조상인 아담의 죄에 영향을 받으며 인간의 본능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악으로 이끈다(원죄).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도 미리 선택되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예정된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몇몇 저작들에서 끌어낸 이 교리는 얀센과 루뱅에서 공부하기 위해 온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이라는 프랑스 출신의 또다른 학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도 훗날 얀센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두 청년은 1604년 얀센이 파리에 가면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소르본대학교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스콜라 학자들 사이의 복잡하고 공허한 논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신학을 되살리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르네상스 학자들의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도들이 무지하고 초라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예수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1611년 얀센은 뒤베르지에를 따라 바욘의 변두리에 있는 그의 부모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 도시의 주교는 1612~14년에 그곳에 있는 주교 관할 콜레주의 관리를 얀센에게 맡겼다.
그뒤 3년 동안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얀센은 뒤베르지에와 함께 초기 교부들의 저작 연구에 몰두했다.
루뱅으로의 귀환
1617년 얀센은 루뱅으로 돌아가서 네덜란드 학생들을 위해 세운 콜레주 드 생트퓔셰리를 맡아 관리했다.
루뱅에서는 바이우스의 제자들과, 1567년 교황 피우스 5세에게 이단 선고를 받은 그의 교리를 위험하다고 생각한 예수회 수사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얀센은 그무렵 바이우스에게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노의 저서를 철저히 연구했는데 그에 따르면 책을 연속적으로 1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담이 저지른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 완전히 자유롭게 선을 행하고 있으며 자신의 공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하여, 특히 아우구스티노가 초고를 쓴 원문연구에 몰두했다.
얀센은 그무렵 자신의 대저작인 〈아우구스티노〉를 쓰기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의 은총은 인간의 선행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예정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선택된 사람들을 영생으로 이끄는 무상의 선물이며, '지옥에 떨어지는 다수'의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파멸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미 운명적으로 은총을 받거나 저주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운명을 가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마니교도들과 싸울 때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지니고 있는 힘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했던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베풀었던 은총의 가치를 철저하게 떨어뜨린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펠라기우스주의). 얀센은 펠라기우스의 교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노의 반박 논문에 열중한 나머지 그가 쓴 마니교도들에 대한 반박 논문을 보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얀센은 또한 〈인간 내부의 개혁에 대한 논문 Discourse on the Reformation of the Inner Man〉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과 〈구약성서〉, 특히 모세5서에 관한 해설서와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소책자를 썼다.
말년
루뱅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얀센은 1635년에 그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1636년에는 이프르의 주교가 되었다.
예수회의 학자인 르네 라팽은 그의 저서인 〈얀센주의의 역사 Histoire du Jansénisme〉(1861)에서 얀센이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개인적인 중재로 주교직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펠리페 4세는 얀센의 〈마르스 갈리쿠스 Mars Gallicus〉라는 소책자에서, 스페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의 프로테스탄트와 동맹을 맺은 프랑스의 추기경이자 총리인 리슐리외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데 동의했던 것이다.
얀센은 주교직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638년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1640년 그의 친구들은 루뱅에서 그가 성 아우구스티노에게 바친 저서를 〈코르넬리우스 얀센 주교의 아우구스티노 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마실리아인들에 대항하여 인간본성·건강·고뇌·치료에 관해 성 아우구스티노가 밝힌 교리에 대하여 Augustinus Cornelii Jansenii, Episcopi, seu Doctrina Sancti Augustini de Humanae Naturae, Sanitate, Aegritudine, Medicina adversus Pelagianos et Massilienses〉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얀센은 이 책을 쓰는데 22년이나 걸렸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내 책에 대한 평가를 로마 교회의 판단에 맡긴다……로마 교회가 취소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철회할 것이다."
얀센의 교리에 대한 이단 선고
1642년의 대칙서에서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청의 인가 없이 출간되었으며 이미 이단 선고를 받은 바이우스의 교리에 기초를 둔 〈아우구스티노〉를 금서로 선포했다.
1653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아우구스티노〉의 5가지 명제를 이단으로 선고했으며, 후계자인 알렉산데르 7세도 교황의 의견을 따랐다. 교황청은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모든 사제와 수사, 수녀들로 하여금 교황이 정한 규정에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시랑의 대수도원장이 된 뒤베르지에 드 오란은 포르루아얄 수녀원의 수녀들에게 얀센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 수녀원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교황의 결정을 받아낸 뒤 그것을 강요하려고 한 예수회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예수회 수사들과 스스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라고 부른 '무시외 드 생시랑'(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제자인 앙투안 아르노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예수회 수사들은 그를 얀센주의자라고 불렀는데, 그들에 따르면 아르노의 교리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것이 아니라 얀센의 것이었다. 블레즈 파스칼은 1656, 1657년에 앙투안 아르노를 옹호하기 위해 〈지방에서 쓴 편지 Les Provinciales〉를 썼다. 소르본대학교의 신학부는 아르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루이 14세는 얀센주의자들이 왕국의 통일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제거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667년 클레멘스 9세가 교황이 된 뒤에는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으며, 교황청과 프랑스 교회 사이에 갈리아주의로 인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그 갈등은 더이상 주요한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이 해결된 뒤 루이 14세는 1705년에 클레멘스 11세에게 예전의 선고를 되살린 대칙서 〈Vineam Domini〉를 받아냈다. 1709년 루이 14세는 포르루아얄의 수녀들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것을 명령했으며, 1710년에는 수녀원을 없애버렸다. 그뒤 1713년에는 케넬의 101가지 명제를 이단으로 선고한 대칙서 〈Unigenitus Dei Filius〉를 받아냈다. 1730년 〈Unigenitus Dei Filius〉가 프랑스 법령으로 공포되면서 결국 얀센주의자들의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723년 얀센의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 자치적인 얀센주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20세기 후반인 지금까지 남아 있다(네덜란드 복고 가톨릭 교회). 얀센주의는 이탈리아로도 퍼져나가 그곳에서 열린 피스토이아 교회회의(후에 이단으로 정죄됨)가 1786년 극단적인 얀센주의 교리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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