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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루아얄

다른 표기 언어 Port-Royal

요약 시토 수도회의 유명한 대수녀원.
정식 명칭은 Port-Royal des Champs.

17세기 프랑스의 문예활동과 얀센주의의 중심지였다. 1204년경 마틸드 드 가를랑드가 베르사유 남쪽에 있는 슈브뢰즈 계곡의 저습지에 베네딕투스회 수도원으로 설립했다. 그곳에 있는 교회는 1230년에 세워졌다.

1609년 젊은 대수녀원장 자클린 마리 앙젤리크 아르노은 절실히 요청되던 개혁을 시작했다. 1625~26년 그곳의 비위생적인 공기 때문에 앙젤리크는 파리에 공동체를 세우고 바로크 양식의 교회를 비롯한 새 건물을 여러 채 지었다.

1638년 은수자들이 그 버려진 건물에 자리잡았는데, 그들은 코르넬리우스 얀센의 친구이자 생시랑의 대수도원장인 장 뒤베르지에 드 오란의 영적 지도 아래 맹세나 특별한 규율 없이 지내는 신앙심이 깊은 평신도들과 세속사제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아르놀가(家)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몇몇 소년을 가르치면서 작은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의 교육방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회의 교육방식과 달랐다. 1648년 일단의 수녀들이 이 건물을 찾아 돌아오자 은수자들은 근처의 언덕에 있는 레그랑주로 옮겨갔다. 이 학교는 1660년까지 존속했다.

1665년 얀센에 대한 공식적인 유죄판결에 서명하기를 거부해온 포르루아얄 드 파리의 수녀들 대부분은 포르루아얄데샹으로 보내져 감금당하고 성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은수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거나 숨어버렸다. 그러나 1669년 클레멘스 9세와 타협하여 '교회의 평화'라고 불리는 10년간의 평온이 찾아왔다.

파리와 레샹의 수녀원은 서로 갈라져 레샹 쪽은 루이 14세의 사촌인 뒤셰즈 드 롱그빌 공작부인의 보호 아래 안주하게 되었으나, 1679년 그녀가 죽자 박해는 다시 시작되고 공동체는 새 수녀들을 가입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1705년 클레멘스 11세는 회칙 〈Vineam Domini〉를 통해 얀센주의자들에 대한 박해조치를 부활시켰으나 남은 수녀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1709년 10월 29일 공동체는 해체되고 수녀들은 다른 수녀원으로 추방되었다.

1710~12년에 건물은 파괴되었고 그곳 묘지에 묻힌 시신들이 파내어져 근처 생랑베르에 있는 공동묘지에 팽개쳐졌다. 1824년 루이 실비라는 법률가가 이 땅을 사들였고 그가 죽은 뒤 사단법인에 넘어가 이들이 교회의 폐허를 발굴하고 작은 박물관을 세웠다. 포르루아얄 드 파리는 혁명기간 동안 감옥이 되었고 19세기 산부인과병원이 되었다. 건물은 보존이 양호한 상태이고 참사회 회의장과 성가대석은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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