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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12. 2.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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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94. 8. 8, 브뤼셀 |
국적 | 프랑스 |
요약
17세기 얀센주의의 주요신학자.
별칭은 The Great Arnauld.
얀센주의는 자유의지와 예정설에 관해 이단설을 주장한 로마 가톨릭 운동이다.
파리의 법률가 앙투안 아르노와 카트린 마리온 드 드뤼 사이에서 태어난 살아 남은 10명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이다(→ 아르노가). 소르본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641년에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얀센주의 창시자이며 아르노 가문의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조언을 베푼 대수도원장 생 시랑의 영향을 받아 〈영성체를 자주 행하는 문제에 대해서 De la fréquente Communion〉(1643)라는 논문을 써 영성체와 고해성사에 대한 얀센주의의 견해를 옹호했다. 또한 〈예수회의 도덕신학 Théologie morale des Jésuites〉(1643)을 써서 예수회와 긴 논쟁에 들어서게 되었다. 후에 샤르트르 출신의 젊은 신학자 피에르 니콜이 이 논쟁에서 그를 도왔다.
1655년 아르노는 코르넬리우스 오토 얀센(얀센주의 운동을 시작한 벨기에의 신학자)의 정통성을 확증하는 소논문 2편을 썼다. 이 논문이 분쟁의 불씨가 되어 결국 그는 1656년 소르본에서 쫓겨났다. 이 논쟁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를 변호하여 〈시골사람들 Les Provinciales〉(1656~57)이라는 일련의 편지를 썼다.
얀센주의자들에게 심한 박해가 가해지는 동안(1661~69) 아르노는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른바 '클레멘스 9세의 평화'(1669)가 찾아오자 루이 14세가 그를 위해 베풀어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몇 년 동안 평온한 생활을 했으며, 그뒤 칼뱅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글과 개신교도 및 가톨릭교도 사이의 논쟁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뒤에 신학자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으며, 전하는 바로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가 그를 추기경으로 삼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1679년 얀센주의자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아르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로, 그 다음에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1682년 브뤼셀에 정착하여 스스로 망명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망명생활중에 여러 가지 조건이 불안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저술활동을 했다. 〈예수회의 도덕관행 Morale pratique des Jésuistes〉(1689~94)의 마지막 6권(처음 2권은 1669~82년에 이미 써놓았음)에서 예수회 궤변가들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갈리아 교회에서 프랑스 군주가 갖는 권리에 관한 논쟁에 개입했다.
그가 말년에 쓴 주요저서들은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니콜라 말브랑슈와 초기에 반예수회 논쟁에 협조했던 피에르 니콜 등의 견해를 반대하여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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