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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보온·장식을 위해 쓰거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는 두의의 총칭.
관모도 쓰개에 속한다. 중국의 〈사기〉나 한국의 고분벽화에 의하면 절풍·나관·소골·조우관·책·건괵·입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진골부터 평민까지 복두를 썼으며,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주로 복두를 쓰고 왕은 오사고모·면관 등을 썼다. 여자의 쓰개로는 몽수가 있었으며, 원나라에서 전해진 족두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은 면류관·익선관 등을 쓰고, 백관은 복두·사모·이암 등을 썼다. 갓류로는 평량자·초립·흑립 등이 있었다.
예장용 쓰개
적관
조선시대 왕비의 법복에 착용하던 관모이다.
1307년(공민왕 19) 명나라 효자황후가 왕비에게 적의와 함께 칠휘이봉관을 보내왔다. 1403년(태종 3)에는 명나라 사신 황엄이 왕의 면복과 함께 왕비 예복 가운데 주취칠적관을 가져왔는데, 휘(翬)나 적(翟)은 조선에서는 보통 적관으로 통했다.
적관은 금·진주 등의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는 적관을 쓰지 않았다.
화관
신라 문무왕 때 중국에서 들어왔으나, 조선시대에는 거의 국속화되어 관모라기보다는 장식품으로 이용되었다. 영조·정조 때에 걸쳐 가체의 사치로 폐단이 많자 화관·족두리를 쓰게 하여 더욱 일반화되었다.
본래는 기녀·동기·무녀 등이 썼으며 오색구슬로 찬란하게 꽃을 꾸며 둘렀다. 화관·족두리를 국가에서 장려한 뒤로는 서민들의 혼례 때 썼으며, 조선 말기에는 정장 때는 족두리를 쓰고 화려하게 꾸밀 때는 화관을 썼다고 한다.
족두리
고려 후기 이후로 사용되었는데, 원(元)나라와 혼인이 많았던 관계로 원나라의 궁중제가 고려로 들어온 뒤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궁중양식으로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모로 쓰였으나 후에는 장식품으로 널리 쓰였다. 족아·족관이라고도 했다. 검은 비단으로 아래는 둥글고 위는 여섯 모로 되었으며, 솜이 들어 있었고 그 가운데는 비운 채로 머리에 썼다.
내외용 쓰개
너울[羅兀]
형태는 원립(圓笠) 위에 자루 모양의 천을 어깨까지 늘어뜨렸으며, 썼을 때 얼굴 부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비치는 천을 댔다.
본래 고려시대 몽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몽수는 너울보다 길이가 길고 귀천이 없이 쓰였다. 고려 말기에 착용계급이 한정되었고, 내외의 의미가 생겼다. 궁중에서는 조선초부터 조선말까지 쓰였다.
쓰개치마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는 너울 대신 쓰개치마를 썼다. 형태는 치마와 같고, 쓸 때에는 치마허리로 얼굴을 둘렀다. 개성지방에서는 '쓸치마'라 했으며 옥양목·명주로 만들었다.
장옷[長衣]
조선 중종 때 서민층의 부녀자들이 외출시 내외용으로 썼고, 상류층 부녀자들은 착용을 금했다.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로, 초록색 무명·명주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자주색을 썼다. 소맷부리에 흰색 거들지를 달았고, 동정 대신 흰 헝겊을 댔으며, 이중고름을 달았다. 조선 말기에는 상류층 부녀자도 썼다.
천의(薦衣)
주로 서민 부녀자들이 썼다. 장옷과 비슷한 형태로 장옷보다 길이가 짧고 소매가 없다. 다홍색에다 연두색 안을 대고 솜을 둔 네모진 것이다.
방한용 쓰개
아얌
액엄(額掩)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에는 남녀공용이었으나 후기에는 서민 부녀자들이 썼다. 귀를 덮지 않으며 검은 자주색 댕기가 달렸는데 이 댕기를 아얌드림이라고 한다.
위는 털로 되었고, 가장자리는 2~3㎝ 정도 검은 털로 선을 둘렀으며, 앞뒤에 끈이 달려 있다.
조바위
조선 말기에 아얌이 사라지면서 생겨난 것으로 상하층 모두에게 쓰였다. 정수리는 뚫려 있고 뺨에 닿는 곳을 동그랗게 하여 귀를 완전하게 덮고 가장자리는 안으로 오므렸다. 겉은 검정색 비단으로, 안은 보통 비단이나 목으로 만들었다.
앞뒤에 술이 달려 있고 술 위에 보석장식을 하기도 한다. 금박이나 구슬로 수를 놓기도 했다.
남바위
이마·목덜미·귀를 덮기 위한 것으로 남녀 모두 썼다. 풍뎅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 이엄(耳掩)에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상류층의 일상복으로 쓰이다가 후기에는 서민층에서도 썼다.
위가 뚫려 있고 모정(帽頂)의 뒤 중앙은 4~5㎝가량 트였다. 양 옆에는 앞뒤를 연결하는 끈이 있다.
볼끼
뺨과 턱을 덮기 위한 것으로 서민들이 썼다. 노인들은 이것 위에 남바위를 덧쓰기도 했다. 기름한 털을 받치고 가장자리에 선을 둘렀으며, 저고리 안고름같이 끈이 양쪽에 달려 있다.
굴레
아이들의 방한용·장식용 쓰개이다.
돌쟁이부터 4~5세 남녀 아이 모두 썼으며 겨울에는 검정비단, 봄·가을에는 갑사로 만들었다. 뒤에는 도투락댕기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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