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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주

다른 표기 언어 Anjou

요약 프랑스 서부 멘에루아르 주를 에워싼 역사적·문화적 지역.

개요

이전의 앙주 지방은 라플레슈 지역 및 샤토공티에 지역과 함께 지금의 멘에루아르 주를 에워싸고 있었다.

원래 로마 시대에 키비타스안데가벤시스였던 곳으로 나중에 앙주 백작령이 되었고 다시 앙주 공작령(1360~)이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시대에는 명목상 프랑스 왕을 대신하는 백작의 통치를 받았으나 9세기에는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

최초의 백작 가문

로베르의 아들이 지배하던 시기에 앙주는 앵줄주르라는 사람에게 위임되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앙주 왕가를 세웠다.

그의 아들 풀크 1세는 앙주에서 노르만족들을 몰아내고 투렌의 일부 지역을 점령해 영토를 넓혔다. 풀크 1세는 942년에 죽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풀크 2세는 이전의 전란으로 파괴된 것들을 재건했다. 960년경 풀크 2세의 뒤를 이은 조프루아 1세 그리즈고넬은 영토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는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으나 새 왕이 즉위한(987) 지 몇 달 후에 죽었다.

조프루아를 계승한 풀크 3세 네라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자 앙주 왕가의 인물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치자에 속하며 987~1040년 재위했다. 그는 침략을 일삼던 이웃 세력들을 앙주의 변경 너머로 몰아내고 자신의 영토 경계를 따라 목재 대신 돌로 굳건한 성채를 쌓았다.

풀크의 아들 조프루아 2세 마르텔(1040~60 재위)은 아버지가 시작한 확장 정책을 계승해 방도무아와 멘의 일부를 앙주에 합병시켰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두 조카인 조프루아 3세와 풀크 4세 르 레생이 상속지를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무력충돌을 벌여 1068년 풀크가 조프루아를 물리쳤다.

그러나 풀크 4세는 풀크 네라가 획득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고 노르망디 공작의 영토 소유권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1109년 풀크 4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풀크 5세는 여러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입은 손실을 만회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들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을 영국의 헨리 1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미망인 사이에서 난 딸 마틸다와 결혼시켰다.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은 마틸다와 결혼함으로써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 대한 계승권을 얻었다. 그는 일생 동안 경쟁자 및 앙주 성주들과 전투를 치러야 했지만 마침내 앙주를 평정하고 1151년 앙주와 멘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아들 앙리(나중에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됨)에게 앙주를 물려주었다.

앙리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플랜태저넷 왕조의 앵글로-앙주 제국이 세워졌으며 그 영토는 잉글랜드에서 피레네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가 13세기초 잉글랜드의 존 왕으로부터 앙주를 빼앗았다. 앙주를 되찾으려던 잉글랜드인들의 노력은 1214년 라로슈오무안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파리 협정(1259)을 통해 앙주는 최종적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2번째 가문

1246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나중에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이 된 동생 샤를에게 왕자령으로 앙주를 주었다(앙주 왕조). 앙주는 샤를의 아들인 샤를 2세에게 계승되었으며 그후 다시 사위인 발루아의 샤를에게 상속되었는데, 발루아의 샤를이 통치하는 동안 앙주 주민들의 경제 및 사회적 여건이 많이 개선되었다.

1328년 발루아의 샤를의 아들이 필리프 6세로 프랑스 왕이 되었다. 그 이래 1351년까지 앙주는 다시 한번 왕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많은 혜택을 입었다.

3번째 가문

프랑스의 장 2세가 1351년 앙주 백작령을 아들 루이에게 주었다.

이로써 3번째 앙주 가문이 시작되었는데 앙주는 1360년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이 시기에 로버트 놀스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앙주 전역을 휩쓸면서 엄청난 파괴를 자행했다. 그후 앙주 공작들은 자신들의 공작령을 지키는 것보다 나폴리 왕국 점령에 더 관심을 쏟았으며 루이 2세는 루이 1세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앙주를 떠나 있었다. 루이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내 아라곤의 욜랑드는 잉글랜드의 공격에 맞서 앙주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앙주의 마지막 통치자는 르네 1세였다.

그가 죽은(1480) 뒤 앙주는 결국 다시 프랑스 왕에게 귀속되었으며 그 이래 프랑스 왕국과 운명을 같이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앙주는 방데 반혁명 반란(1793~96)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州) 제도가 도입되면서(1790) 앙주라는 단위는 법적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주로 농촌 지역이 대부분이다. 루아르 강 유역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포도와 과일, 꽃이 재배되어 파리에서 팔린다. 비옥한 저지대는 앙제 시(市)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마시프아르모리캥 지역의 좀더 척박한 고지대로, 남쪽으로는 모주로 둘러싸여 있다.

루아르 강 유역의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포도주로 사브니에르, 라 포송니에르, 에피레, 생조르주쉬르루아르, 로슈오무안, 뮈르, 술랜, 생플로랑르비에유 등이 있다. 뱅당주는 과일맛이 나는 백포도주이다. 소뮈르의 백포도주는 맛이 쌉쌀하다. 중세 프랑스 북부의 방언이 주로 사용되며 나이 많은 농부들은 아직 프랑스 고어를 쓰고 있다. 마르크 르클레르의 〈Les Rimiaaux d'Anjou〉(1913~48)는 동시대 작가들이 지방 사투리들을 부활시키려고 기울인 노력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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