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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

다른 표기 언어 Alexander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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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31, 아라곤 하티바
사망 1503. 8. 18, 로마
국적 바티칸시티

요약 부패하고 세속적이며 야심에 가득 찼던 교황으로, 정치 목표들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끊임없이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교회의 영적인 유산을 소홀히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발전하는 데 이바지했다.
세도를 떨치던 보르자 가문의 스페인 분가에서 태어났다. 볼로냐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456년 추기경으로 임명받았다. 교황청 부상서국장을 지내면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교황 선거인들에게 자신의 성직록들을 증여하는 등 성직매매를 일삼았음에도 1492년 교황에 선출되었다. 1493년 아직 10대인 아들 체사레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교황 재위기간 동안 알렉산데르는 왕조·교회·정치를 망라한 복잡한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 47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1498년 체사레는 추기경직을 그만두고 무자비한 정책을 펼쳐 이탈리아 북부를 수중에 넣었고, 로마냐·움브리아·에밀리아 등의 공국을 정복했다.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

ⓒ Cristofano dell'Altissimo/wikipedia | Public Domain

부패하고 세속적이며 야심에 가득 찼던 교황으로, 교회의 영적인 유산을 소홀히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발전하는 데 이바지했다(르네상스). 세도를 떨치던 보르자 가문의 스페인 분가에서 태어났다.

발렌시아의 주교(훗날에는 추기경)인 삼촌 알론소 데 보르자가 그를 맡아 교육시켰고, 10대에 불과한 그에게 성직록들을 주었다. 로드리고는 볼로냐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456년 2월 22일 교황 갈리스토 3세가 된 삼촌으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받았다. 교황청 부(副)상서국장을 지내면서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았고, 교황 비오 2세에게 심한 질책을 받으면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로 행세하며 살았다.

예술활동을 후원했고, 자녀들을 많이 낳았으며, 주로 스페인에 그들의 생활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로마 귀족 출신 반노차 카타네이라는 여인과 결혼해 4명의 적자(嫡子)인 후안·체사레·호프레·루크레치아를 낳았는데, 교황 재위기간 동안 이들의 복잡한 사생활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로드리고는 교황 선거인들에게 자신의 성직록들을 증여하는 등 성직매매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는데도 1492년 8월 10일에서 11일 밤 사이의 소란스러웠던 교황선거에서 알렉산데르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되었으며, 로마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는 교황청 재정의 개혁을 단행했고,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서 대단히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지위는 프랑스 왕 샤를 8세에게 위협을 당했는데, 샤를은 1494년 나폴리 왕국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했으며, 유력한 델라 로베레가(家) 출신으로 알렉산데르의 정적이었던 한 추기경의 사주를 받아 교황의 폐위 및 개혁 공의회 소집안으로 교황을 협박했다(이탈리아 전쟁). 정치적으로 고립된 알렉산데르는 투르크 왕 바예지드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495년초 로마에서 샤를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데르는 프랑스 군주들이 전통적으로 교황에게 보여온 존경을 받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나폴리 통치에 대한 샤를의 요구를 거부하고, 밀라노와 베네치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손을 잡음으로써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1493년 9월 아직 10대인 아들 체사레를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교황의 총애를 받던 줄리아 라 벨라의 형제이자 훗날 교황 바오로 3세)와 함께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교황 재위기간 동안 알렉산데르는 왕조·교회·정치를 망라한 복잡한 정책들을 추진하기 위해 47명의 추기경을 임명했다. 아들 후안을 간디아(스페인) 공작으로 삼은 뒤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4세의 사촌 마리아 엔리케스와 결혼시켰다. 호프레는 나폴리 왕의 손녀 산차와 결혼하게 했고, 루크레치아는 처음에는 밀라노의 조반니 스포르차에게 시집을 보냈다가 스포르차가 성불구라는 이유로 교황칙령에 의해 결혼을 무효로 만든 뒤 아라곤의 알폰소와 다시 결혼시켰다.

알폰소가 암살당하자 루크레치아는 페라라의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를 3번째 남편으로 맞이했다. 1497년 6월 14일 알렉산데르가 아끼던 아들 후안이 살해당함으로써 교황의 가문에 비극이 닥쳤다. 큰 고통에 시달리던 알렉산데르는 개혁 계획을 선언하여 교황청의 사치를 제한하며 교황청 상서국을 재조직하고, 성직매매와 성직자 축첩 관행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했다. 1494년 피렌체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 교황청의 악폐들을 단죄하고 교황의 폐위를 주장한 도미니코 수도회 탁발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대해 교황은 극도의 자제를 보여, 1498년 5월 그 탁발수사가 몰락하기 직전까지도 신학자들과 권력자들은 교황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알렉산데르는 정치 공작을 일삼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1498년 체사레는 추기경직을 그만두고서 보르자 가문과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했다가 결혼무효 요청을 해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체사레는 침공과 암살로 얼룩진 무자비한 정책을 펼쳐 이탈리아 북부를 수중에 넣었고, 로마냐·움브리아·에밀리아 등의 공국을 정복했으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존경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The Prince〉에서 체사레를 일류 정치가의 전형으로 삼았다. 로마에서는 알렉산데르가 오르시니가(家)와 콜로나가(家)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줌으로써 스페인과 동맹을 확고히 했다. 그가 성사시킨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은 신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 영역으로 나누고, 왕들에게 '진정한 부권'(patronato real), 즉 식민지화한 선교지에서 왕이 교회를 통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알렉산데르는 예술의 후원자로서 로마대학교 본관을 세웠고, 카스텔산탄젤로를 복원했으며 기념비적인 교황청 상서국 건물을 세웠다.

또한 바티칸 궁전들을 장식했고, 미켈란젤로를 설득해 성베드로 대성당 재건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하게 했으며, 1500년을 거룩한 희년(喜年)으로 선포하여 그해를 대규모 행사로 기념하도록 했다. 최근에 알렉산데르의 사생활을 좋은 방향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의 종교 신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가 전생애에 걸쳐 벌인 활동에는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그가 정치 목표들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끊임없이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마키아벨리와 여론이 평가한 것만큼 부패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고, 변호자들이 평가한 것만큼 교세 확장에 이바지하지도 못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이른바 악한 교황들의 목록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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