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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497년 사육제 기간에 일어난 사치품 소각 사건.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의 부패와 사치를 비판했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은 소년들이 자행한 사건으로, 사보나롤라가 주도한 종교개혁의 일부였다.
149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사치품 소각 사건. 당시 부패한 성직자와 전제군주에 맞섰던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영향에 따라, 1497년의 사육제 기간 동안 '사보나롤라의 소년들'이라 불리던 10대의 소년들이 부패와 사치에서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온갖 화려한 집기와 가구, 예술품, 음란한 그림, 액세서리, 도박용 기구 등을 모아 쌓아놓고 불을 지른 사건을 말한다. 따라서 이 사건의 맥락은 사보나롤라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1482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강사가 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다. 1485년 무렵 신의 계시를 받은 그는 종교적 예언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패한 교회와 귀족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1494년 이탈리아 전쟁 때 프랑스의 왕 샤를8세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견했는데 샤를8세가 피렌체를 함락하자 그의 권위는 한층 강화되었다.
이어 샤를 8세와의 협상으로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그는 당시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를 비롯한 로마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종교개혁을 실행에 옮겼다. 허영의 소각 사건은 바로 그가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 무렵 그가 주도한 극단적인 개혁적 행사였다.
허영의 소각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했다고 전한다. 심지어 화가 보티첼리 등도 이 운동에 동조하여 자신의 그림들을 불에 던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도 성경을 읽었고, 술집과 유흥가가 철시했으며, 음주와 가무, 도박과 경마가 금지되었다. 이런 조치들이 급격하게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던 데에는 만연했던 당시 교회의 부패상에 대한 반발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교황인 알렉산더 6세는 특히 부패한 교황이었다. 정부와의 사이에 네 명이 넘는 자식을 낳았고, 추기경 시절부터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엄청난 돈을 축적했으며, 교황의 자리도 돈으로 매수한 것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이런 교황에 대해서도 회개를 촉구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돈과 추기경의 자리를 주겠다고 회유했는데, 사보나롤라는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빨간 모자가 아니라, 주님의 붉은 피로 물든 거룩한 모자를 쓰고 싶다”고 반박하면서 거절했다.
타협 없는 그의 개혁 성향은 곧 적을 만들어 내었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과 교황이 결합한 '아라비아티(Arrabbiati)'라는 당파가 형성되었고, 프랑스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사보나롤라를 고립시켰다. 결국 과도한 개혁 성향으로 인해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파문을 당하고, 교황에게 매수당한 피렌체 수도사들에게 고발되었다. 그는 결국 신성재판에 소환되었는데 그가 응하지 않자 강제로 그를 구속했고,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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