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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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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어린 시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보내져 20년 동안 지내면서 플라톤과 그의 동료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플라톤이 죽은 후 헤르메이아스의 요청으로 아소스로 가 37세에 결혼하여 딸을 얻었고 사별 후 헤르필리스에게서 아들 니코마코스를 얻었다.
이후 미틸레네에서 아카데메이아를 본뜬 철학 학파를 세우고 생물학에 대한 선구적 연구를 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고찰하면서 영혼은 육체와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42세경부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다가 거의 50세에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을 모든 탐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광범한 영역에 걸쳐 강의했다. BC 323년 칼키스의 어머니 영지로 간 후 62세에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

ⓒ Jastrow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필리포스 2세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인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다.

당시 의술은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인 리케이온에서는 의술과 실제 의료행위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의술과 마케도니아의 궁정생활을 접한 탓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의 영향이 강한 철학사상을 내놓았고, 왕자들과 궁정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여러 번 표현했다.

제1기(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 시절)

아카데메이아(Academeia)

원래는 영웅 아카데모스에게 바쳤다고 하는 아테네 교외에 있는 올리브 숲.

ⓒ Tomisti / wikipedia | CC BY-SA 3.0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아버지가 죽자 친척으로 추정되는 프로크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고, 프로크세노스는 BC 367년 그를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아카데메이아에 보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곳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이 기간은 그의 지적 성장의 제1기였으며, 플라톤과 그의 동료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림없이 아카데메이아의 모든 활동 영역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때때로 수사학 공부에도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아카데메이아와 경쟁한 이소크라테스 학파에 맞서 글을 쓰기도 했다. BC 348(또는 347)년 플라톤이 죽자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아카데메이아를 이끌었고 그뒤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다.

아테네를 떠난 동기는 플라톤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불만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으나 이 해석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지인이었으므로 처음부터 학파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리포스 왕이 BC 348년 그리스 도시국가 올린토스를 노략질한 뒤에 일어난 아테네의 반(反)마케도니아 감정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그럴 듯하다. 아테네를 12년 동안 떠나 있었던 탓인지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의 동료들보다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 특히 제자이자 동료인 에레소스의 테오프라스토스를 더 높이 평가했다.

제2기(여행)

에게 해의 아시아 쪽에 새로 건설된 도시 아소스에서는 그리스의 용병 출신인 아타르네오스의 헤르메이아스가 페르시아 군주들의 부하 신분으로 출발하여 소아시아 북서부 지방의 재정적·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했다.

헤르메이아스는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방문한 뒤 그리스의 규범과 철학을 아시아 지방에 전파하기 위해 아카데메이아 분원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플라톤의 제자 2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칼케돈의 크세노크라테스와 함께 아소스로 갔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Politica〉 제7권의 12개 장을 쓴 듯하다. 이 글에서 철학과 정치학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도시국가(폴리스)의 최고 목적은 철학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그리스의 철학자

ⓒ Rosenzweig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고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인뿐이며 따라서 그리스인은 비(非)그리스인을 노예로 삼아 비천한 일을 시킬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기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왕권에 관하여 On Kingship〉를 썼고, 이 책에서 플라톤과 달리 철학자와 왕의 기능을 분명하게 나누었다(철학자-왕). "왕이 철학자가 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익하지도 않다.

오히려 왕은 참된 철학자들의 충언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왕은 자기 왕국을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행동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견자 헤르메이아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조카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딸을 얻었다. 〈정치학〉에는 이상적인 결혼 나이를 남편은 37세, 아내는 18세로 규정한 대목이 있는데,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나이가 37세였다.

피티아스가 18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티아스는 오래 살지 못했고 그녀가 죽은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필리스와 함께 살았으며 아들 니코마코스를 얻었다. 아소스 아카데메이아에서 3년을 보낸 뒤 근처의 레스보스 섬으로 옮겨 수도 미틸레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친구 테오프라스토스와 함께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본떠 철학 학파를 세웠다. 그리고 생물학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려 선구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생물학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인과관계, 즉 목적론적 인과관계에 주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의 생명체는 자연적 목표 또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생명체의 구조와 성장은 이 목적을 알아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목적론과 이론이 모두 중요하지만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이론이 항상 관찰에 종속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발생에 관하여 On the Generation of Animals〉에서 벌의 발생 양식에 대해 잘 모른다고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이 충분히 밝혀지면 신뢰를 받아야 하는 것은 이론이라기보다는 관찰이며, 이론은 관찰 사실에 의해 확증되어야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과 동물의 생활을 연구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관계도 고찰했다. 〈영혼에 관하여 De anima〉에서 그는 영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일시적으로만 육체 속에 살 뿐이라는 플라톤의 견해를 배척했다.

그대신 물질적 존재의 긍정적 가치를 더 강조하면서 영혼은 육체와 본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생명의 원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플라톤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영혼을 육체의 형상, 육체를 영혼의 질료라고 정의했다. BC 343년말(또는 BC 342초) 그의 나이 42세경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초청으로 13세 된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기 위해 펠라로 갔다.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최고의 지식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들을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Alexander III Magnus)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자, 그리스 북부 왕국 마케도니아의 26대 군주

ⓒ Brandmeister~commonswiki / wikipedia | Public Domain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철학으로 계몽된 고전적 용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리스인의 우수함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비그리스 미개인을 정복하고 그들과 피를 섞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충고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결혼을 허용했으며, 페르시아 귀족 가문 출신의 아내를 맞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정치 이데올로기 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이 그리스 세계에 일으키기 시작한 근본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정책이 도시국가의 중요성을 줄인다고 반대하기도 했다.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파괴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기로스를 다시 세웠다.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3년을 보낸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기로스로 되돌아왔으며, 그곳에서 테오프라스토스 등 자기의 철학 학파와 계속 교류했다.

제3기(리케이온의 창설과 지도)

리케이온(Lykeion)

아리스토텔레스가 BC 335년 아폴론 리케이오스를 기려 아테네의 작은 숲속에 설립한 학원

ⓒ Hohum / wikipedia | Public Domain

BC 335년까지 스타기로스에 머문 뒤 거의 50세가 되었을 때 아테네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아카데메이아의 지도자 자리는 스페우시포스가 죽은 뒤 비어 있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생물학을 함께 연구한 칼케돈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이어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와 완전히 인연을 끊지는 않았지만 BC 335년 경쟁학원을 리케이온에 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학원 안에 있는 지붕 덮인 산책로인 페리파토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 학파는 '페리파토스'(逍遙學派라고도 함)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뒤 12년 동안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합하여 리케이온을 모든 탐구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과학과 철학의 광범한 영역에 걸쳐 강의를 제공했다.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플라톤주의자들이 수학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 반면 리케이온은 생물학과 역사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짧은 기간이나마 아테네에서는 마케도니아에 강력히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있었고 아테네를 섭정한 마케도니아 장군 안티파트로스와도 친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아테네를 떠나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로 갔다. 이듬해 그곳에서 위장병으로 죽었으며, 이때 나이는 62(또는 63)세였다. 그가 아테네를 떠난 까닭은 아테네인들이 철학에 대해 2번 죄짓는 것(첫번째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일을 가리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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