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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시대 직전인 6~7세기초에 걸쳐 아랍 유목민의 위대한 시대가 존재했다(유목). 유목민들 가운데는 사막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정착생활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으므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정착종족들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과 교역관계에 있던 정착민들이 이러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였으므로 이 시기에는 유목민적 가치관이 아라비아를 지배했다. 사막에 사는 종족들은 모두 같은 조상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이슬람 시대 이전에는 일처다부제에 기초한 모계친족사회가 일부 존재했었으나 이슬람교에서 남성은 4명의 합법적인 아내와 여러 노예 첩들을 둘 수 있는 반면 여성은 1명의 남편만을 두도록 규정했으므로 초기 이슬람 시대에 부계 중심의 친족관계가 형성되어 그후 확고히 자리잡아갔다.
주민 모두가 유목민이었던 것은 아니며 반도 대부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에서는 아열대농업이 이루어졌다.
서부 연안 근처의 일부 지역에서는 열대작물이 재배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오아시스는 야스리브로서 마호메트 시대 이후 메디나로 알려져 있다. 야스리브를 비롯하여 아라비아 전지역의 농업을 개척한 것은 유대교를 믿는 부족들인 듯하다. 종교 외에는 이웃 아랍 종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이들 부족은 공격을 받을 때에는 그들 소유의 작은 요새나 성으로 피신했으나 평상시에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살았다.
마호메트가 등장한 후 야스리브 오아시스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했으며 다른 오아시스들에도 일부 아랍인들이 거주했고 나머지는 유목생활을 영위했다.
오아시스 농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작은 정착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역은 메카였다. 지금의 메카에는 소규모 농업이 행해지고 있으나 6세기에는 전혀 없었던 듯하며 원주민은 사원을 관리하고 섬기는 종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뒤에 카바로 알려진 사원 주변에는 성역이 있었으며 사원을 순례하는 몇 개월은 성스러운 기간으로 지정되었다. 이 기간 중 성역에서는 피의 복수전이 잠시 멈추고 적대관계에 있는 부족들도 평화롭게 만날 수 있었으므로 메카는 점차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갔다. 600년경에는 이미 메카의 상인들이 예멘에서 가자와 다마스쿠스로 가는 교역로를 독점했으며 또다른 교역로를 통해 메카와 페르시아 만 어귀가 이어졌다.
물질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중요한 예술적 표현형태로서 웅변과 시가 발달했다.
웅변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슬람 시대 이전의 훌륭한 시들은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다. 일반적인 시의 형태는 40~100행, 또는 그 이상의 행으로 이루어지는 송시(頌詩) '카시다'(qasida)로, 각 행마다 똑같은 운(韻)과 복잡한 운율구조가 반복되며 〈무알라카트 Mu⁽allaqāt〉라는 시집에서 가장 훌륭한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개별 작가들의 시를 모은 시집들도 전해진다.
카시다는 6세기 전반에 발달했다고 하지만 가장 오래된 시까지도 원숙함과 높은 수준, 표준화된 주제의 전개순서를 보여주고 있어 그보다 앞서 실험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카시다의 첫부분에서는 애조를 띤 서시(序詩) '나시브'(nasib)가 나와 감상을 위한 분위기를 만든다. 시의 중심부에서 시인은 자신을 비롯해 그가 속한 부족을 자랑하며 적대적인 부족을 풍자적으로 조롱하거나 자신의 후원자를 찬양한다.
시인의 예술성은 이렇게 고정된 주제들을 다루는 가운데 명백히 드러났는데, 주제를 다루는 방법 자체가 사막 생활이라는 좁은 한계 속에서 고결하게 행동하려는 노력의 반영이었던 듯하다. 시는 중심적인 예술형태로서 부족을 찬양하고 사막 유목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을 찬양하는 등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면에서 시인은 지금의 언론인과 비교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뛰어난 시인의 풍자를 매우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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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라비아의 사막 문화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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