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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과 유교
신라의 문화는 고유한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 중국 문화를 가미한 점이 특색이었다.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6세기 이래 지배층은 중국 문화를 환영하여 받아들였으나, 외래문화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들의 생활과 기호에 알맞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한자의 사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두[吏讀]라는 독특한 차자(借字) 표기법을 창안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서 자연히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 순수비문은 6세기 중엽 신라의 한문 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545년(진흥왕 6)에는 이사부(伊斯夫)와 거칠부가 중심이 되어 국사를 편찬했는데,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미 6세기경부터 유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중시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으나, 화랑도가 청소년층의 도덕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했다.
불교와 도가사상
이 시기 신라의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담당한 것은 불교였다. 불교는 5세기 전반경 고구려를 통해서 민간에 전해졌으나, 법흥왕 때에 공인을 받을 때까지 박해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는 일단 공인을 받게 되자 호국신앙으로서 크게 유행했다.
호국의 도량으로서 황룡사 같은 큰 사찰이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백좌강회(百座講會)나 팔관회 등 호국적인 행사가 베풀어졌다. 당시 유명한 승려들 중에는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이나 자장 등이 있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도가사상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의 형태를 띠고서 발달했다. 산악숭배사상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 성모(聖母) 전설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농업과 정치의 두 부분에 관련이 깊은 천문학이 발달했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경주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서 천체 관측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로 5세기경의 왕릉급 고분에서 나오고 있는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은(金銀) 세공품은 신라가 금속·야금 및 세공 방면에서 성취한 높은 기술수준을 말해주며,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독자적으로 유리를 만들어 썼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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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학문과 종교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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