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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전(全)역사를 3시기로 구분하여 통일 이전을 상대(上代), 통일기는 중대(中代)와 하대(下代)로 나누었다. 반면 〈삼국유사〉는 통일 이전을 상고(上古)와 중고(中古)로 나누고 통일기를 하고(下古)로 잡았는데, 이는 왕실 혈통상의 변화 또는 불교의 공인과 같은 특정한 사실을 기준으로 구분한 데 불과하다. 신라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한국사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시기를 구분한다면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진한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탄생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장구한 기간인데, 이는 편의상 3시기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신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성읍국가로 출발했다.
역사서에는 건국 연대를 BC 57년이라 했으나, 경주 일대의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볼 때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개 씨족집단의 연합에 의해서 발족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혁거세(赫居世)가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연합 형식에 의해서 또는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서 차츰 주위의 여러 소국들을 망라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몇 차례 지배층이 바뀐 듯하다.
또한 신라가 비록 연맹왕국의 맹주가 되었다고 해도 주변의 소국들에 대한 지배·복속의 정도는 매우 미약했다. 각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신라는 중국 군현 당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같은 상태는 적어도 3세기말경까지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신라를 포함한 낙동강 동쪽의 진한사회는 새로운 국제관계의 변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고구려가 낙랑·대방 2군을 멸망시키면서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세력을 뻗치게 됨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마한의 여러 나라가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통합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소백산맥 너머의 이러한 정세 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선두에 서서 진한 사회를 통합해나갔다.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4세기 중엽에 이르면 신라는 종래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우선 박·석·김 3성에 의해서 교체되어온 왕위가 김씨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세습되기 시작했으며 왕위의 부자(父子) 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내물(356~402 재위)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는 정청(政廳)의 지배자 또는 으뜸 가는 지배자의 뜻으로 해석되어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때인 377, 382년 2차례에 걸쳐서 중국 북조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특히 382년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와 전진왕 간의 문답에서 이미 종전의 신라가 아님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초기에는 백제의 군사적 압력이 격심하여 고구려의 군사원조를 받아 백제군을 격퇴했다. 이 사실은 유명한 광개토왕릉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자 신라는 적대관계를 지속해왔던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이같은 백제와의 동맹관계는 550년대까지 12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줄곧 내부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다. 5세기에 신라가 꾸준히 국력을 강화해간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대형 고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 경주 북방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冷水里)에서 발견된 503년(지증마립간 4)의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라 국왕은 결코 여러 부족장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며, 다만 5부 귀족집단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집권국가의 완성
법흥왕(514~540 재위) 때부터 태종무열왕이 즉위(654)하게 될 때까지의 기간은 〈삼국유사〉의 저자가 '중고'(中古)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시대로 설정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사에서 볼 때 매우 특징 있는 시대였다.
신라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장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단서를 연 것은 법흥왕의 부왕인 지증왕(500~514 재위)이었다. 이때 국호가 신라로 확정되었으며, 마립간 대신 중국식의 왕호(王號)가 사용되었고, 지방통치제도로 주군(州郡)이 채택되었다. 또한 502, 508년 2차례에 걸쳐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어 120년간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회복되었다. 법흥왕 때는 이처럼 다져진 토대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520), 병부 등 주요관청을 설치하며(516~517),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513) 등 전반적으로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했다.
또한 이때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획기적인 조처가 있은 뒤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는데(536), 이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국가토대가 다져진 기반 위에서 진흥왕(540~576 재위) 때부터 정복전쟁을 활발히 추진해나갔다.
이미 법흥왕 때 신라는 김해에 위치한 본가야(本加耶 : 금관가야)를 정복하여(532) 가야연맹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 가야 여러 나라를 잇달아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세력의 맹주인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562).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신라는 가야 정복과 병행하여 한강유역에도 손을 뻗쳤다. 즉 진흥왕은 백제와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상류지방을 점령(551)했다가 다시 백제군이 수복한 지 얼마 안 되는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결국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했다(553).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도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편으로는 대중국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흥왕 때의 눈부신 정복사업은 현재 각지에 남아 있는 4개의 순수비가 말해주고 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이처럼 확대된 영토를 지키는 데 모든 국력을 쏟았다.
진평왕(579~632 재위) 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끈질긴 국경 침범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면서 국내의 지배체제를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선덕왕(632~647) 때는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특히 642년에 신라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한강유역 방면의 일대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경기 화성시 남양)이 함락 직전의 위기에 놓였으며, 낙동강 방면의 요새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남 합천)은 백제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신라는 당(唐)과의 외교를 강화함으로써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한 국난기에 신라의 지배층은 한때 분열하여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647). 하지만 이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에 의해서 옹립된 진덕왕(647~654 재위) 때 야심적인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김춘추는 654년 진덕왕이 죽자 즉위하여 태종무열왕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는 삼국통일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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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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