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다른 표기 언어 Scipio Africanus Major
요약 테이블
출생 BC 236
사망 184/183, 캄파니아 리테르눔
국적 로마

요약 로마의 장군.
(영). Scipio Africanus the Elder. 정식 이름은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Major)

ⓒ Miguel Hermoso Cuesta/wikipedia | CC BY-SA 3.0

개요

자마 전투(BC 202)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무찔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승리로 그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성을 얻었다(BC 201)(→ 로마사).

출신 배경

아버지와 할아버지 및 증조할아버지 모두 생전에 콘술(집정관)을 지낸 로마의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역시 푸블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스키피오의 아버지는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인 BC 218년에 콘술이 되었다. 젊은 스키피오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버지와 함께 티키누스 강(지금의 티치노 강) 연안에서 벌어진 기마전에 참전했을 때였다. 아버지가 부상을 입고 적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것을 본 그는 앞으로 돌진하여 아버지를 구해냈다. 이 일화는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스키피오의 친구 라일리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역사에 기록했는데, 아마 사실일 것이다.

스키피오의 어린 시절이나 그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 아이밀리아와 결혼한 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콘술(BC 216)이던 장인은 칸나이에서 전사했다. 스키피오는 푸블리우스와 루키우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푸블리우스는 건강이 나빠서 공직에 나가지 못했고 나중에 소(小)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양자로 맞았다.

작은아들 루키우스는 BC 174년에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다. 스키피오의 외모는 카르타고노바(지금의 스페인 카르타헤나)에서 주조된 일부 동전(여기에 새겨진 인물이 그라는 것은 거의 확실함)에서 볼 수 있고, 나폴리 근교에서 발견된 도장 반지에 새겨 있는 것도 그의 초상으로 여겨진다.

군대생활

스키피오는 BC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군사 호민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약 4,000명의 생존자가 모여 있던 카누시움으로 몸을 피했고, 여기서 그는 로마를 버리고 탈주하려는 일부 겁쟁이들의 음모를 대담하게 뒤엎었다. 그후 BC 213년에는 공공 건물을 관리하는 쿠룰레 아이딜리스(造營官)라는 고위 공무원 자격을 얻어,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가 법정 연령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호민관들이 그의 입후보에 반대하자, 그는 "모든 로마인이 나를 아이딜리스로 삼고 싶어한다면, 나는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한 나이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곧이어 그의 가문과 나라에 재난이 잇따라 일어났다. 아버지와 숙부는 스페인에서 싸움에 지고 전사했으며, 카르타고인들은 스페인의 에브로 강 방어선까지 질풍처럼 진격했다(BC 211).

BC 210년에 로마인들은 스페인에 증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고참장군들은 아무도 이 일을 맡으려 하지 않았고 젊은 스키피오만이 후보로 나섰다고 한다. 어쨌든 로마인들은 그에게 증원군 지휘권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명목상으로 행정관이 아닌 '프리바투스'로 스페인에 부임했다.

프라이토르도 콘술도 아닌 사람에게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군사 지휘권을 부여한 이 사건은 중요한 헌법상의 선례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는 스페인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얻었다. 그는 단순히 카르타고군을 궁지로 몰아넣어 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있는 한니발에게 증원군을 보내지 못하도록 막는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공격 정책을 계승하여 전세를 바꾸고 반도에서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싶어했다. 이런 일은 BC 210년에는 한낱 꿈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스키피오는 확신과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 위업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이루어졌다.

BC 209년 스키피오는 스페인에 있는 적군 3개 부대가 적어도 10일 동안은 총사령부가 있는 카르타고 노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타라코(타라고나)에 있는 사령부에서 급히 육해군 연합군을 이끌고 나와 카르타고 노바의 적군 사령부를 기습했다.

석호의 수위가 낮아져 북쪽 성벽이 드러난 덕분에 그는 공격에 성공했다. 바닷물이 빠진 이런 현상은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도움 탓으로 돌려졌지만, 아마 돌풍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사령관이 신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부하 장병들의 믿음을 더욱 굳혀주었다. 카르타고 노바에서 그는 필수품과 보급품, 스페인인 인질, 현지의 은광, 훌륭한 항구, 그리고 남쪽으로 진격하는 데 필요한 전진기지를 확보했다. 그는 군대에 새로운 전술을 훈련시킨 뒤 바이티카의 바이쿨라(바일렌)에서 카르타고군 사령관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무찔렀다(BC 208). 로마군은 싸움이 벌어지면 대개 2개 부대가 후방에서 전선을 긴밀하게 지원했지만 스피키오는 이 싸움에서 경무장한 부대를 전위부대로 내세워 적의 시야를 가린 다음 본대를 둘로 나누어 적의 측면을 기습했다.

달아난 하스드루발이 결국 이탈리아에서 형인 한니발과 합류하자 스키피오는 그의 퇴로를 막으려는 불가능한 일을 현명하게도 포기하고, 스페인에서 그가 맡은 사명(스페인에 남아 있는 나머지 카르타고군 2개 부대를 무찌르는 것)을 완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BC 206년 일리파(세비야 근처 알칼라델리오)에서 이 사명을 완수했다. 그는 이곳에 적의 본대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측면으로 돌아가 적을 포위했으며, 그후 가데스(카디스)를 확보함으로써 로마가 스페인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했다.

BC 205년에 콘술로 선출된 스키피오는 대담하게도 이탈리아에 들어와 있는 한니발을 무시하고 아프리카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원로원의 반대를 억누른 뒤 일부 지원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갔다. 그는 원정에 대비하여 군대를 훈련시키면서 대담하게도 이탈리아의 발끝에 해당하는 로크리에피제피리를 한니발에게서 빼앗았다. 그러나 그가 이 도시를 다스리도록 남겨놓고 온 플레미니우스라는 사람이 그후 부정을 저지르는 바람에, 스키피오의 정적들은 그를 비난할 구실을 얻었다.

BC 204년 그는 약 3만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프리카에 상륙하여 우티카를 포위했다. BC 203년초에 그는 하스드루발(기스고의 아들)과 그의 동맹자인 누미디아의 시팍스의 진영을 불태웠다. 적은 바그라다스 강 상류에 있는 대평원(지금의 튀니지의 마자르다 강 연안의 수크알카미스)에 병력을 모으려고 애썼는데, 스키피오는 이 병력을 아래로 밀어붙인 다음 군대를 재빨리 움직여 이중으로 측면을 포위하는 작전으로 적군을 격파했다.

자마 전투

그가 튀니스를 점령하자 카르타고인들은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애썼지만, 그후 한니발이 아프리카로 돌아오자 그들은 BC 202년에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남서쪽으로 진격해 기병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온 누미디아 군주 마시니사와 합류했다. 이어서 그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과 맞섰다. 그의 측면 포위 전술은 그에게 그 전술을 가르쳐 준 스승격인 한니발에게는 먹혀들지 않아서 실패했지만, 로마 기병대와 누미디아 기병대가 카르타고 기병대의 추적을 따돌리고 한니발 군대의 후방을 습격하자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오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이 승리를 기념해 아프리카누스라는 성을 받았다.

만년

BC 199년에 스키피오는 켄소르(감찰관)로서 프린켑스 세나투스(제1원로)가 되었다.

그는 그리스 독립정책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2번째로 콘술(BC 194)이 되었을 때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가 그리스에서 추방된 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를 침범할 것을 우려해 로마군을 그리스에서 완전히 철수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그의 우려는 시기상조였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BC 193년 아프리카에 사절로 파견되었고 동방에도 파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티오코스가 그리스로 진격했다가 로마군에게 쫓겨난 뒤 스키피오의 형 루키우스가 대신 지휘권을 받았고 자신은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다(BC 190). 형제는 함께 아시아로 건너갔지만 스키피오는 중병에 걸려 형 루키우스가 마그네시아에서 안티오코스를 무찌를 때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이 승리로 루키우스는 아시아게누스라는 이름을 얻었음).

한편 로마에서는 대(大)카토가 이끄는 스키피오의 정적들이 스키피오 형제와 그들의 친구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작했다.

루키우스의 지휘권 보유 기간은 연장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누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제시한 너그러운 평화조약은 가혹하게 수정되었다. 이어서 '스키피오 형제 재판'이 벌어졌는데 이 재판에 대한 고대의 서류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에게 500탈렌트를 받은 명목(전쟁 배상금인가, 개인 전리품인가)을 밝히기 거부했다는 이유로 BC 187년에 비난을 받았지만 이 비난을 교묘히 받아넘겼다.

아프리카누스 자신도 BC 184년에 고발당한듯 싶지만 유죄 판결은 받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영향력은 흔들렸고 그는 로마에서 캄파니아의 리테르눔으로 은퇴해 직접 밭을 갈면서 아담한 농가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세네카는 나중에 이 농가의 작고 추운 욕실과 그가 전성기에 살았던 저택의 사치스러운 욕실을 비교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상하고 병든 그는 BC 184년이나 183년 조국에서 사실상 추방당한 상태로 죽었다. 로마 교외의 아피아 가도 연변에 그의 가족 묘지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유해를 배은망덕한 도시 로마가 아니라 리테르눔에 묻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영향

동정심 많고 교양 있고 도량이 넓은 스키피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나 스페인과 아프리카 원주민 군주들의 우정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휘하 장병들의 헌신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행동가였지만 동시에 다소 신비로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전설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신적 후예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유피테르 신의 총애를 받은 인간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전술을 개혁하고 전략적 통찰력을 발휘하여, 한니발을 물리치고 스페인과 아프리카 및 동방의 그리스 세계에서 로마의 지배권을 확립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높이 평가했고 자신의 취미에 맞는 분위기를 가진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도시에서 느긋하게 쉬기를 좋아했는데, 이런 행동은 카토 같은 고루한 로마인들의 분노를 샀다. 당시 로마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한 그리스 문화는 사회를 문명화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으며, 스키피오는 그리스 문화의 이런 영향을 환영한 당시의 로마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는 그리스에 공감했기 때문에, 그리스 문화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로마가 세계에서 해야 할 사명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병합하기보다는 로마의 보호령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10년 동안(BC 210~201) 그는 국민의 희망에 따라 헌신적인 군대를 지휘했다. 그의 지위는 거의 왕이나 다름없어 보였으며 스페인 부족들은 그를 왕으로 환영했다. 그는 로마 장군으로는 처음으로 휘하 장병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제로 선언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을 확신하면서도 정상적인 정치적 수단(그는 이 방면에서는 두드러진 능력을 전혀 보이지 못했음)을 이용했을 뿐, 다른 방법으로는 원로원에 앉아 있는 로마 귀족들의 권위에 전혀 도전하지 않았다. 개인적·정치적 경쟁자들은 그의 관대한 외교정책에 반발했고, 그가 로마 사회에 그리스 문화를 장려하는 것에도 반발했다. 이런 반발은 결국 그의 몰락을 초래했지만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지중해의 강대국이 되는 것이 로마의 운명임을 보여주었다. 스키피오의 영향은 로마 세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르네상스 초기 사람들은 그의 생애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으며, 이 관심은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 및 로마 세계와 그리스도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한 이상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페트라르카는 라틴어 서사시 〈아프리카 Africa〉에서 그를 찬양했으며, 이 작품으로 페트라르카는 약 1,500년 전에 스키피오가 유피테르 신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1341년 계관시인이 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다른 백과사전


[Daum백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