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고구려의 불교

다른 표기 언어

요약 고구려 시대의 불교.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372년(소수림왕 2)으로서, 이해 6월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보내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374년(소수림왕 4)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다.

다음해 2월에 초문사(肖門寺:省門寺라고도 하며, 후대에 興國寺로 바뀌었음)를 지어 아도를 머물게 하고, 이불란사(伊弗蘭寺:후대에 興福寺로 바뀌었음)를 지어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순도는 전진왕 부견의 사신과 함께 왔으므로 북방에서 온 것이 거의 확실하나, 아도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에서는 진(晉)에서 왔다고 하였으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에서는 오(吳)에서 왔다고도 하고, 고구려에서 위(魏)에 들어갔다가 뒷날 신라(新羅)로 돌아왔다는 설 등이 있어 분명하지 않다.

이로 미루어볼 때 중국 북방의 불교가 공식으로 들어온 것은 372년이지만, 그 이전부터 민간 차원에서의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인 지둔(支遁)이 고구려도인(高句麗道人)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당대의 명승인 축법심(竺法深)의 덕행을 찬탄하고 있는데, 지둔이 입적(入寂)한 것은 366년이므로 이미 372년 이전에 고구려 사람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둔이 주로 강남에서 활약했던 승려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와 강남 사이에 이미 교통이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도가 중국 남방의 진이나 오에서 고구려로 오는 일이 가능하였다.

순도나 아도가 가지고 왔던 불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은 쉽지 않다. 이에 대하여 〈해동고승전〉 순도조(順道條)에 "인과(因果)를 보이고 화복(禍福)으로 유인하였으나 백성들의 마음이 질박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재단할 방법이 없어서 법사가 비록 쌓인 것이 깊고, 이해의 폭이 넓었으나 널리 펴지는 못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에 초전된 불교의 내용이 선악의 행위에 대한 화복의 인과를 밝히는 초보적인 수준으로서 당시 중국의 북방불교적인 흐름과 통하고 있었으며 또한 전래 초기에는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도는 전진에서 왔지만, 아도는 진이나 오에서 왔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려에는 중국의 남방불교도 동시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도와 아도 다음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백족화상(白足和尙) 담시(曇始)이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그는 396년(東晉 孝武帝 太元 21)에 경율(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였으며, 삼승(三乘)을 선양하고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세운 뒤 405년(東晉 安帝 義熙 1)에 장안(長安)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가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다스리던 시대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가 가지고 온 불교는 북방의 불교였을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고국양왕(故國壤王)은 391년(고국양왕 8) 3월 불교를 드높여 믿어서 복을 구하라는 칙명을 내렸으며,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94년 (광개토왕 4) 8월 평양에 9개소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이 불교를 존숭하여, 불교를 더욱 전파하기 위하여 승려 의연(義淵)을 북제(北齊)로 파견하였으며, 의연은 그곳에서 승려 법상(法上)에게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연대와 황제의 이름, 북제와 진에 전한 사람, 〈십지경 十地經〉·〈대지도론 大智度論〉을 전한 사람 등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으며, 법상은 석가모니의 입멸에서 북제 무평(武平) 7년(576년)까지는 1465년이 지났으며,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AD 67)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대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 불교가 그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 승려로서 삼론학(三論學)을 배운 이가 많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교학적인 내용은 주로 삼론학계통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말엽에 당(唐)으로부터 도교가 전래되면서 차츰 배불정책을 시행했으며, 이에 따라 불교는 쇠퇴하고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 불교의 특징은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그 성가가 더 높았다는 데 있다.

고구려의 승려로서 외국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사람은 승랑(僧朗)이다. 그는 고구려의 요동 사람으로서 북제 말엽에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기반을 닦은 학승(學僧)으로서 '섭산고려랑대사'(攝山高麗朗大師)로 불렸다.

그는 북제에서 삼론학을 배운 다음 강남의 종산(鐘山) 초당사(草堂寺)에 머물면서 은사(隱士) 주옹(周顒)에게 이를 전하였다.

이후 양(梁) 무제(武帝) 재위 초기에 섭산(攝山)의 서하사(棲霞寺)로 갔다. 원래 불교를 숭상하던 양 무제는 승랑이 섭산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승정(僧正) 지적(智寂)과 지관사(止觀寺) 승전(僧詮) 등 10명에게 그의 밑에서 삼론학을 배우도록 했으나 오직 승전만 학문을 크게 성취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승전의 문하에서 법랑(法朗)을 비롯한 4명의 명승이 배출됨으로써 승랑의 삼론학은 강남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으며, 가상대사 길장(吉藏)은 법랑의 법을 이어 마침내 삼론학의 대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승조(僧肇) 이후 단절되었던 삼론종의 전통을 다시 잇는 신삼론학(新三論學)의 대성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승랑의 삼론학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삼론종의 대성자인 길장은 승랑을 '섭산대사'(攝山大師)·'섭령대사'(攝嶺大師)·'대랑대사'(大朗大師) 등으로 불렀다.

또한 중국 불교사의 위치로 볼 때 성실종으로부터 삼론종을 분리하기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진정한 삼론종을 성립시킨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승랑의 교학은 삼론종의 중도론(中道論)으로서 인식방법론으로는 이제합명중도설(二諦合明中道說)이라 하고, 본체론으로는 이제중도위체설(二諦中道爲體說)로서 그 요체는 비이(非二) 비불이(非不二)의 중도를 밝히는 것이다. 승랑 이후로 고구려의 학승들은 주로 삼론학을 종지로 삼았으며, 중국과 일본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실법사(實法師)와 인법사(印法師)가 승랑의 뒤를 이어 삼론학을 널리 폈으며, 특히 인법사는 촉(蜀)지방에서 전법활동을 하였다.

승랑이 중국에서 삼론종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면, 일본 삼론종을 가능하게 하였던 사람은 역시 고구려 승려인 혜관(慧灌)이었다.

일본 삼론종의 시조로서 존경을 받았던 그는 625년 1월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해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자 왕명으로 기우제를 행하여 효험을 보임에 따라 승정(僧正)으로 임명되었다. 삼론종의 대성자인 길장에게서 삼론을 사사하여 이를 일본에 전하였으며, 정상사(井上寺)를 세우고 삼론을 강의하여 복량(福亮)·지장(智藏)·도등(道登)·혜사(慧師)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

특히 혜사는 고구려에서 수학하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길장에게서 삼론학을 배웠으며, 흥복사(興福寺)의 행선(行善) 역시 고구려에 머물면서 불교를 배웠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고구려의 불교교학이 일본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천태산(天台山)의 파약(波若)은 진대에 강남의 건강(建康)에 도착하여 천태지의대사(天台智顗大師)에게서 사사하였다고 하며, 지황(智晃)이라는 승려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능통하여 독보적인 존재로서 활약하였으며, 〈섭대승론 攝大乘論〉을 북방에 전한 담천(曇遷)이 건강에 머물 당시에 교류를 맺었다고 한다. 혜관보다 앞서서 일본에 불교를 전했던 이는 고구려 승려 혜편(慧便)이었으며, 혜자(慧慈)는 595년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602년에는 승륭(僧隆)과 운총(雲聰)이 고구려에서 왔다.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는 호류 사[法隆寺]의 금당벽화(金堂壁畵)를 남긴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있다.

610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불교 이외에 유교(儒敎)에도 밝았으며, 공예·맷돌·그림의 거장이었다. 아직 회화의 불교지였던 일본에서는 그를 스승으로 삼아 그림을 배웠으며, 더불어 훌륭한 공인이기도 하였던 그를 통하여 일본에서는 비로소 예술다운 예술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혜량(惠亮)은 신라에 들어가 초대 국통(國統)이 되었으며, 보덕(普德)은 백제에 들어가 열반종(涅槃宗)을 열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고구려

고구려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고구려의 불교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