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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회의 뒤에 계속된 평화는 1886년에 무너졌고 근동에서는 새로운 위기가 조성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불랑제 장군이 지도하는 애국운동이 독일에 대한 복수를 선동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위기를 이용해 의회에서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1880년에 통과한 7년제 군사예산도 어느덧 갱신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보당을 포함한 의회의 여러 정당들은 새로 상정된 상비군 확대안에 동의할 용의가 있었지만 3년 기한을 그 조건으로 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에게 분쟁의 구실을 주었고 비스마르크는 고의로 의회와 분쟁을 일으켰다. 1886년 11월 의회는 3년 기한으로 군사예산을 승인했지만 곧바로 해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보수당·자유보수당·국민자유당을 설득해 '선거 카르텔'을 결성하게 했다. 이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가톨릭 중앙당은 후퇴하지 않았지만 진보당은 의석의 태반을 잃었다. 군사예산은 7년 기한으로 정식 가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스마르크는 의회가 자기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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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군사예산으로 의회와 분쟁한 비스마르크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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