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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총리 취임과 군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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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과 빌헬름 1세 사이의 갈등은 1862년 9월 군제개혁을 둘러싼 위기까지 치달았다. 빌헬름 1세는 문제해결을 위해 프랑스 주재 대사로 갓 부임한 비스마르크를 불러들여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와 왕의 제휴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빌헬름 1세는 자신의 독자적인 군사정책 유지만을 원했을 뿐 비스마르크가 제창하는 모험적 외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우선 자신을 국왕에게 필요불가결한 인물로 인식시킨 다음 국왕이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되는 외교정책으로 국왕을 끌어넣으려고 국내 분쟁을 조장했다. 그리고는 하원에서 "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철과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고 한 총리 취임 첫 연설인 이른바 '철혈연설'을 했다.

1863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 연방의 개혁과 통일을 토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체 독일 군주회의를 소집했다. 만약 회의의 주제가 독일의 여러 군주를 회생시키는 것이었다면 비스마르크는 앞장서서 오스트리아와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목적은 독일 각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연방의 중앙권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연방회의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민대표기관을 설립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 개혁안에 반대했고 빌헬름 1세를 설득해 회의 참가를 포기하게 했다. 빌헬름 1세가 불참함으로써 군주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끝났다. 독일의 여러 군주들과 협조하는 오스트리아의 정책에 대응해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우호를 강조했다. 1863년 가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다음 이 조약을 프로이센이 통제하는 독일 관세동맹에 강요했다. 이 협정에는 오스트리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연방제가 존속하고 있었지만 독일의 경제적 분열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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