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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란인 시아파의 이슬람 왕조.
Buwayhid라고도 함(945~1055).
아랍인과 투르크인에 의한 정복기간 중간에 이란과 이라크의 서쪽을 다스렸던 토착왕조이다.
다일람족(북부 이란인) 부예의 세 아들인 알리·하산·아흐마드에 의해 창건되었다.
930년경 다일람족의 지도자 마르다위즈 에븐 제야르에 의해 카라이의 지방 총독으로 임명된 알리는 에스파한과 파르스를 점령했고, 하산과 아흐마드는 지발·후제스탄·케르만을 장악했다(935~936). 945년 12월 아흐마드는 최고사령관(amῑr al-umarā⁾)으로서 아바스조(朝)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수니 칼리프를 꼭두각시로 조종하면서 부이조의 통치를 확립했다(946. 1). 이때부터 알리는 이마드 앗 다울라(⁽Imād ad-Dawlah), 하산은 루큰 앗 다울라(Rukn ad-Dawlah), 아흐마드는 무이즈 앗 다울라(Mu⁽izz ad-Dawlah)라는 영예로운 호칭으로 불렸다.
이 왕조의 세력은 왕가의 여러 구성원과 각 지방별로 분열되었으나 아두드 앗 다울라(949~983)의 통치기간 동안 잠시 통합되었는데 그는 원래의 영토에 오만, 타바리스탄, 조르잔을 병합해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때 부이조는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시라즈 근처에서 공공사업을 벌여 병원을 짓고 쿠르 강을 가로질러 반드에아미르(Band-e amῑr : 에미르의 댐)를 건설했다. 사만 왕조, 함단 왕조, 비잔틴 제국, 파티마조와 관계를 맺었으며, 시인 알 무타나비와 페르도우시를 비롯하여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시아파의 종교행사를 대중적이고 열정적으로 치렀는데, 이라크의 안나자프와 카르발라의 성지 순례를 장려하는 데에서 이 나라의 시아파적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부이조의 주요 문화 중심지는 이란의 라이와 나인 및 이라크의 바그다드이다.
부이조 예술의 강한 페르시아적 특성은 셀주크조 시대를 거쳐 13세기 몽골 침입까지 이슬람 예술에 정취를 더해주었다. 부이조 사람들은 금속 세공을 꽤 좋아했는데 특히 은 세공이 뛰어났다. 그들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페르시아인인 사산 왕조의 기술과 주제를 이용하곤 했다.
전형적 장식에는 야생동물·새·악사 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는 인물이 고도로 양식화한 사산 왕조의 전통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가브리(Gabri) 자기라고 불리는 부이조의 도자기는 백색 화장토(化粧土 : 굽기 전 도자기 전체에 입히는 묽은 점토)를 입힌 붉은색 바탕의 토기이다. 무늬는 바탕의 붉은 몸체가 드러나도록 화장토를 긁어내어 만든다. 황색 또는 녹색의 납 유약이 사용되었다. 어떤 것들은 줄무늬로, 또 어떤 것들은 정교한 구상 및 도안으로 장식했는데, 새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한 네발짐승의 신화적인 모습도 그려넣었다.
이 도자기 중 가장 오래된 몇 점이 현존하는데, 그중 시인 페르도우시(1020 죽음)가 쓴 페르시아 민중 서사시 〈샤 나메 Shāh-nāmeh〉에 나오는 이야기를 삽화로 그려넣은 것도 있다.
아두드 앗 다울라가 죽은 후 약화된 경제, 군의 이탈, 전반적인 부이 왕가의 분열이 왕조의 쇠락을 재촉했다. 부이조의 마지막 통치자 아부 나스르 알 말리크 알 라힘은 셀주크의 토그릴 베그에 의해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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