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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세 초기는 12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서유럽에 점차 정착했다.
이 어지럽고 어두운 시대에 철학을 키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보이티우스(480경~525경) 등 후기 로마 사상가와 안셀무스(1033~1109) 같은 수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 시대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방법과 이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정신의 대상이고 인간의 모든 노력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신의 내부로 향하고 이 정신을 뛰어넘어 진리를 보여주는 지성의 빛으로 나아감으로써 진리와 미의 이신적 세계와 만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400경)과 〈삼위일체론 De Trinitate〉(400~416)에는 인식·지각·기억·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 De civitate Dei〉(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보이티우스와 교부들
보이티우스는 포르피리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서들과 이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중세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기초를 전해 주었다. 또 이 책들은 보편자(1개 이상의 특정 사물에 적용할 수 있는 명사)의 성격 등 중요한 철학문제를 제기했다(개체). 그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525경)는 인식과 실재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담고 있으며, 섭리, 신의 예지, 우연, 운명, 인간의 행복 등도 생생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이 중세로 흘러들어가는 또 하나의 흐름은 그리스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185경~254경),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경~394경), 위(僞)디오니시오스(500경),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580경~662)였다(교부철학).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에리게나라고 불린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9세기에 이 그리스 신학자들의 몇몇 글을 라틴어로 옮겼으며, 신플라톤주의 노선에 따라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한 방대한 저서 〈자연의 구분에 관하여 De divisione naturae〉(862~866)를 썼다.
그에 따르면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제일의 단일체이며 이 단일체로부터 다수의 창조물이 흘러나온다.
안셀무스
10세기 카롤링거 왕조가 무너진 뒤 서유럽에서 지적 사변은 점점 쇠퇴했다.
11세기에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웠고,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신앙에 해로운 것으로 불신한 페트루스 다미아누스 같은 개혁가들이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편 다른 수사들은 변증법과 철학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인 안셀무스는 이탈리아인으로서 프랑스 베크 수도원의 대원장이 되었고 그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안셀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사용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이 먼저지만 이성이 반드시 뒤따르면서 사람들이 믿는 것에 이유를 제공한다. 수사들이 성서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그는 〈독백론 Monologium〉(1077)을 썼는데, 이 속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쓴, 신의 존재에 대한 3가지 증명이 들어 있다. 그는 다수의 선한 것은 최고로 선한 것 또는 신에서 생겨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와 아벨라르
시토 수도회 수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같은 수사들은 신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의심스러워했다.
베르나르두스는 당시의 몇몇 사람들이 변증법에 지나치게 빠진다고 불평했다. 그는 신비주의적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전개했는데, 이 교리의 영향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파리의 생빅토르 대수도원 수사들도 신비주의적 명상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유학예와 철학을 명상의 보조수단으로 장려했다.
열렬한 논리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는 후기 스콜라 철학의 방법에 기여한 신학의 방법을 개척했다.
〈긍정과 부정 Sic et non〉(1115~17)에서 그는 신학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 반대하는 양쪽의 가장 권위있는 견해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다. 보편자 문제에 관해 그는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즉 보편자는 사실상 정신적 개념이지만, 보편자가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오로지 개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보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種)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이 개체들을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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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세 초기 서양철학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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