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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81, 프랑스 파리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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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51. 1. 13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대수도원장, 루이 6세와 7세의 고문.
생드니 대수도원 교회 개축을 감독함으로써 고딕 건축 양식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비상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1091년에 집 근처에 있던 생드니 대수도원에 들어가 수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수도원의 학우는 같은 또래의 소년 루이 카페였는데, 이 소년이 1108년에 왕이 된 루이 6세이다. 쉬제는 생드니 대수도원장인 아당의 비서이자 왕의 고문이 되었다(생드니수도원교회). 아당의 비서로서 쉬제는 영국왕 헨리 1세이자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인 노르망디의 앙리 보클레르크를 상대로 여러 외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는 노르만족 군주가 프랑스의 무질서한 봉건주의와는 대조적으로 강력하고 규율잡힌 통치를 하는 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갈리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 디오니시우스의 묘가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은 크게 숭앙받는 곳이었다. 쉬제는 이곳의 운명과 프랑스 왕의 운명이 항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았고, 생드니의 공복(公僕)으로서 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확대함으로써 왕과 귀족들을 그들이 서로 믿을 수 있는 이념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왕이 농민들과 중류층을 보호할 수 있고 또한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1122년 쉬제는 생드니 대수도원장에 선출되었고, 그 직후에 생드니를 상징적 매개로 하여 왕과 귀족을 결속시킬 수 있으리라는 자신의 이론을 시험할 기회를 맞았다. 112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왕 루이 6세의 영지를 침공하자, 루이는 평상시 생드니의 성유골(聖遺骨)과 함께 교회에 보관되어 있던 성 디오니시우스의 깃발(Oriflamme)을 앞세워 전장에 나갔다.
루이가 쉬제와 함께 이렇게 성 디오니시우스에 대한 귀족들의 신앙심에 호소한 결과, 그동안 선왕과 그를 따르던 것보다 휠씬 많은 귀족들이 충성을 다해 그를 따랐다. 루이의 군대와 생드니의 깃발은 큰 공포를 자아내어 하인리히 5세는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했다.
쉬제는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에 합리적이고 인간애를 지닌 인물일 뿐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생드니의 수사들을 이전의 대수도원장 아당 때보다 더욱 경건하고 엄격하게 생활하도록 이끌었다.
아당 때에는 수사들이 지나치게 세속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소문이 나빴으나, 쉬제는 클레르보의 대수도원장 베르나르두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상황을 바로잡았다. 또한 그밖에 많은 일에도 교황의 친밀한 고문이자 당시 유럽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던 베르나르두스와 협력했다. 쉬제는 그의 강력한 적이 될 수도 있었고 동지가 될 수도 있었으나, 동지가 되는 편을 택했다.
1137년 루이 왕이 죽은 뒤 후계자 루이 7세는 쉬제가 맡아오던 주요 고문 역할을 배제했고, 이에 따라 쉬제는 그뒤 5년을 무너져가던 생드니 대수도원 교회의 개축을 마무리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작업에 사용된 많은 건축방법상의 혁신들, 예를 들면 둥근 아치가 아닌 독창적인 뾰족한 아치 , 리브 볼트, 광범위한 스테인드 글라스, 건물 정면의 꽃무늬 창문 등은 쉬제의 착상에 따른 것인 듯하다. 1142년 루이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봉신(封臣)인 샹파뉴의 백작 티보의 영지를 침공했고, 그결과 내전이 일어났다.
강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던 티보는 프랑스 군주에게 언제나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젊은 왕은 무분별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었다. 쉬제는 선왕에게 늘 그랬듯이 루이 7세에게도 적극적인 고문이 되어 티보와 루이 사이에 평화조약을 주선했다. 두 사람은 경이스러운 생드니 교회당 봉헌식에서 조약문서에 서명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루이 7세에게 티보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데 대한 속죄로 십자군을 일으켜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성지를 해방시킬 것을 촉구했다.
쉬제는 이 주장에 반대하여 왕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이로써 그는 처음으로 베르나르두스와 교황, 유약하고 어린 왕의 뜻에 반대했다. 1147년 6월 11일 루이와 왕비 엘레아노르는 제2차 십자군 원정길에 올랐다. 루이는 대수도원장 쉬제를 자기가 없는 동안 섭정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왕권을 맡겼다.
십자군 원정은 크게 실패했고 본국에서 쉬제는 많은 돈을 임의로 낭비하긴 했으나 잘 다스렸다. 그는 새롭고 더욱 공정한 조세방법을 고안하고, 벌목(伐木) 금지법을 통과시키는 한편, 왕이 없는 사이에 왕의 동생이자 드뢰의 백작인 로베르를 왕으로 세울 목적으로 일으킨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1149년 루이가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쉬제가 왕권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곧 잘못된 생각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150년 쉬제는 베르나르두스와 함께 또다른 십자군 원정을 계획했으나,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말라리아에 걸려 앓다가 1151년 1월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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