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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480경, 롬바르디아 왕국 누르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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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547경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축일은 7월 11일(이전에는 3월 21일). 서방교회 수도원제도의 창시자.
(영). Saint Benedict of Nursia.
몬테카시노에 베네딕투스 수도회 수도원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베네딕투스가 만든 회칙은 유럽 전역에 걸쳐 수도원 생활의 규범이 되었다. 1964년 교황 파울루스(바오로) 6세는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회칙을 따르는 수사들이 중세 때 많은 유럽 국가들을 복음화하고 문명화한 사실을 고려해 베네딕투스를 전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베네딕투스의 생애에 관한 사실과 관련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받는 문헌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대화 Dialogues〉 제2권이다.
그레고리오는 베네딕투스의 제자들 중 4명으로부터 그에 관한 자료를 얻었다고 한다. 그레고리오의 책에는 숱한 표적과 기적이 실려 있지만, 그가 요약해놓은 베네딕투스의 생애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연대를 표시하지는 않았다. 베네딕투스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부모의 도움으로 로마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가 살던 때는 쇠퇴해버린 제국의 도시 로마가 중세 교황청이 자리잡은 로마로 바뀌어가는 시기였다. 그의 청년기는 테오도리쿠스가 다스리던 때로, 로마는 원로원과 집정관들로 이루어진 행정 및 통치 체제의 과거 유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546년 로마가 고트족 왕 토틸라에게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모두 피난하는 바람에 텅 빈 도시가 되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를 다시 정복하려다가 실패하게 되자, 교황권은 이때 생긴 행정 공백을 메웠으며, 그 직후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작은 이탈리아 영토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장악했다(가톨릭 교회).
베네딕투스는 동방의 수도원제도와 동트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청년시절 로마의 부도덕함에 충격을 받고 심브루이니아 구릉지대에 있는 엔피데(지금의 아필레)에 은둔했다. 그후 로마에서 동쪽으로 65㎞ 떨어진 아브루치 산 기슭 수비아코에 폐허로 남은 네로의 왕궁 근처 호숫가 바위 동굴에서 은거했다. 그는 주변에 있는 한 수도원의 수사인 로마누스로부터 음식과 수사 옷을 공급받으며 그 동굴에서 3년을 지냈다. 그가 경건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주변의 한 수도원에서 대수도원장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대수도원장이 되어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의 열정은 반발을 샀고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동굴로 돌아왔으나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그는 수사 12명을 단위로 하는 수도원 12개를 세우고 직접 그 모든 수도원들을 관장했다. 로마의 귀족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자녀들을 그에게 맡겨 수사가 되게 했는데, 이 수사 후보생들 중에서 베네딕투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 마우루스와 플라치드가 나왔다.
후에 이웃 사제의 음모에 시달려 그곳을 떠났으나, 12개의 수도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몇 제자들은 그를 따라 남쪽으로 왔으며, 그는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카시노의 가파른 언덕 위에 정착했다. 그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그때까지 이교도들이었으나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했다. 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는 그 부근에서 수녀원 원장이 되어 살다가 동생보다 조금 앞서 죽었다.
베네딕투스의 생애 가운데 유일하게 연대가 확실히 밝혀진 것은 542년 고트족 왕 토틸라가 그를 방문한 사건이다. 수사들은 전통적으로 그가 죽은 날짜로 전해내려온 3월 21일을 베네딕투스의 축일로 지키며, 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7월 11일에 지킨다.
그의 성품은 그레고리오가 지적했듯이 그의 수도원 회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그가 현명하고 영적으로 성숙하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아버지처럼 자애롭고, 엄하면서도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인도하는 일이 몸에 배어 있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 바침으로써 평정을 누리는 영적인 대가의 면모을 지니고 있다.
성 베네딕토의 규율
그레고리오는 단 한번 베네딕토의 규율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언어는 분명했고 판단은 명확했다고 한다.
베네딕토는 은수자로서 수도생활을 시작했지만, 혼자 수도생활을 할 경우에 따르는 어려움과 영적인 위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성숙하고 노련한 수사에게는 혼자 하는 수도생활이 최선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규율은 전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염두에 두었으며, 그가 수도생활 관습에 이바지한 점들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해 동안의 시험기간을 정한 것이다(공주수도원제도). 이 시험기간을 마친 사람은 종신서약을 한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전달한 베네딕토의 규율에 대해 엄숙히 순종서약을 했다.
회헌(會憲)의 차원에서 베네딕토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은 수도원의 관리와 영적·물질적 복지를 위한 간결하고도 완벽한 지침서를 제공한 것이다.
이 지침서에 따르면 수사들이 선출하는 대수도원장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한 그는 연장자들이나 전체 공동체의 협의를 구해야 하지만 그것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율법과 수도원 회칙에만 구속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수사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부원장, 식료품보관 담당자(청지기), 수련원장, 손님 담당자 등을 임명하며, 수도원에 소속된 모든 개인의 활동과 공동체 생활의 조직을 관장한다. 사유재산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금지된다. 성무일도(매일 예배) 담당은 엄격하게 배당된다. 수련자·손님·병자·독서자·요리사·시설관리자·짐꾼 등 모든 사람이 주목대상이 되고, 잘못에 대한 처벌은 세부적으로 명시된다.
이렇게 세심하고 포괄적인 규칙도 훌륭한 것이지만, 회칙 전반에 깔려 있는 영적이고 인간적인 조언은 중세의 모든 수도원 및 종교 규율서 가운데서 독특하게 두드러진 것이다(종교규율). 베네딕토가 대수도원장 및 식료품보관 담당자에게 한 조언과 겸손·침묵·순종에 대한 훈계는 교회의 영적인 보물 가운데 일부가 되었으며, 수사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법령을 제정한 교회 법률가들까지도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베네딕토는 또한 온건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수사들에게 기후에 맞는 옷을 입도록 허락하고, 식사를 충분히 하고(로마 교회가 지키는 금식일 외에는 따로 금식일을 두지 않음), 잠을 충분히 자게 했다(7시간 반~8시간). 일과시간은 3등분해, 5~6시간은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5시간은 가사, 수공(手工), 정원 가꾸기, 경작 등의 육체 노동을 하고, 4시간은 성서와 신앙서적을 읽도록 했다. 이렇게 기도·노동·학습이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은 베네딕토가 남긴 또하나의 유산이다. 모든 노동은 수도원의 자급자족을 위한 것이었다.
지식·문학·예술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가르쳐야 할 소년들이 항상 있고 수도원 자체가 예배서, 성서, 교부들의 책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가르치고 사본들을 필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베네딕토의 신중성은 나이, 능력, 기질, 욕구, 영적 상태 등을 고려해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 대하도록 거듭 허용한 데서 잘 나타난다. 그밖에도 그가 연약함과 실패를 솔직하게 용인하고,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을 동정하고, 영적인 조언과 실제적인 조언을 결부시킨 데서 그의 뛰어난 인간성이 엿보인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신중성을 악용해 안락과 방종을 변호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일도 생겼지만, 베네딕토의 규율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빈·정절·순종의 조언을 완전하고도 정확하게 지키라는 요구를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사막의 신부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누구보다도 요한 카시아누스의 글들을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어왔는데도 1938년까지 이 규율서가 베네딕토 개인의 업적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1938년 과거에 베네딕토의 규율서를 표절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대가(大家)의 규율 Regula magistri〉이라는 익명의 문서가 사실은 베네딕토가 사용한 자료들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많은 유력한 학자들은 대부분 〈대가의 규율〉이 먼저 씌어졌다는 주장을 선호한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채택된다면, 베네딕토의 규율서 가운데 1/3가량(공식적인 전례의 장들을 제외한다 해도)은 〈대가의 규율〉에서 유래한 것이 되는 셈이다.
바로 이 부분은 서론과 겸손·순종·대수도원장에 관한 장(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베네딕토의 규율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길고 산만하고, 종종 특이한 표현이 튀어나오는 〈대가의 규율〉 자체가 비할 데 없이 뛰어나 전유럽을 감탄시킨 베네딕토의 규율서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베네딕토의 규율서는 수도원 생활방식에 실제적이고도 영적인 지침을 주었으며, 그후 1,500년 이상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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