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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데어 로에의 후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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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활동

그후 4년간 많은 설계도를 그렸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37년에 미스는 미국으로 갔다. 바우하우스에서 미스를 만나 열렬한 옹호자가 된 필립 존슨의 주선으로, 그는 와이오밍 주에 교외 주택을 설계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 설계도 역시 도면으로만 남아 있을 뿐, 실제 건축으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직후, 시카고 아머 학교(나중에 일리노이공과대학이 됨) 건축학부를 이끌 사람을 찾고 있던 건축가 존 홀러버드를 만났다. 미스는 건축학부를 맡는 조건으로 '완전한 재량권과 연봉 1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는 재량권은 얻었지만, 연봉은 요구한 것보다 적게 받았다. 1958년 그가 은퇴할 무렵, 이 학교는 미스가 직접 설계한 캠퍼스뿐 아니라 잘 통제된 교육방법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의 다양한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건물의 특징은 입체적 단순함이었다. 드러나 있는 철재 골조물, 교정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황갈색 벽돌 등이 이 건물에 사용된 기본 재료였다.

미스가 정년 퇴직한 해에, 필립 존슨과 공동으로 설계한 뉴욕 파크가의 시그램 빌딩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유리와 청동 및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초고층 사무용 건물이었다. 국제주의 양식은 이 건물로 인해 절정에 이르렀고, 미스는 국제주의 양식을 선도하는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50년대의 미국은 재료와 과학 기술의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것은 옛날 독일의 '총체적 문화'라는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다. 불과 8년 전만 해도 〈하우스 뷰티풀 House Beautiful〉이라는 잡지는 미스가 미국에 온 직후에 지은 건물들(특히 일리노이 주 플레이노에 에디스 판스워스를 위해 지은 집)을 미국 생활방식에 대한 사악한 위협이라고 비난하여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당혹감을 대변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주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빈정대기까지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타임 Time〉지와 〈라이프 Life〉지 및 〈포춘 Fortune〉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는 이제 "20세기 건축 혁명이 완수되었고, 그 혁명은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다. 미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구상한 설계도를 대부분 실현한 유리상자형 건물이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잇따라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과 취향의 흐름은 곧 방향을 바꾸었다. 강철 골조와 유리벽은 더이상 건축학적 독창성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종말처럼 여겨졌다. 젊은 세대의 근대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앞날이 촉망되는 에로 사리넨은 "우리는 우리 건축의 지평을 탐구하고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르 코르뷔지에와 겸손하게 손을 잡고,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배척한다. " 미스의 충실한 제자였던 필립 존슨마저도 오로지 단순함만을 추구하는 스승을 떠나 좀더 낭만적인 역사주의 쪽으로 돌아섰다.

후기 활동

미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1920년대에 전개한 신념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 신념에 따른 아름다운 건물들을 창조하느라 평생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작품으로는 시카고 아파트 건물(1949, 1951), 디트로이트의 주택단지인 라페이에트 파크(1956~63), 볼티모어의 사무용 건물인 원 찰스 센터(1963), 휴스턴의 박물관(1958), 시카고의 페더럴 센터(1964), 워싱턴 D. C. 의 공립도서관(1967) 등이 있다. 그러나 모든 건물 가운데 미스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서베를린에서 1968년에 준공된 20세기 미술관(나중에 신국립미술관으로 개명)이었다.

큰 몸집으로 관절염을 심하게 앓게 된 미스는, 그의 전기를 쓴 피터 블레이크가 표현했듯이, 그 자신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강암 조상처럼 보이게 되었다.

1930년에 이혼한 그는 시카고의 미시간 호 근처에 있는 낡고 널찍한 아파트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그의 사무실은 집 근처의 낡은 창고 건물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파울 클레의 그림들을 아꼈고, 값비싼 여송연을 피웠으며, 우아한 옷을 입었고, 독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그는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그가 친절하고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으며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즐겨 회상하곤 한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이 차갑다는 비난에 대해, "우유라면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지만 차가운 건물이나 따뜻한 건물은 있을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건축을 창조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 즉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념비에 불과한 모든 양식을 경멸했다. 미스는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 또한 건축이란 "한 시대의 의지가 공간으로 옮겨진 것으로 그러한 공간은 살아 있고 항상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스는 자신을 그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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