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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

다른 표기 언어 Taira family , 平氏

요약 12세기 막강한 권력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일본의 무사가문.

개요

다이라 씨의 역사는 제50대 간무[桓武] 덴노의 손자 다카무네[高棟]가 825년에 '다이라'라는 성을 받은 데서 비롯된다.

1156년 무렵부터 1185년까지 왕실의 높은 관직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 가문은 뒤에 단노우라 해전[壇ノ浦海戰]에서 궤멸되었다.

가문의 기원과 1차 집권기

8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즈음의 일본은 왕실 재정이 바닥나고 황족은 엄청나게 많았다.

재정의 유출을 어느 정도 막기 위해 왕실의 방계(旁系) 친족에게 성(姓:당시 왕족은 성이 없었음)을 주고 그들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정책이 취해졌는데, 구즈하라[葛原]의 아들이자 제50대 덴노 간무의 손자였던 다카무네가 '다이라'라는 성씨를 받게 되었다. 그 후손들은 간무 다이라[桓武平]로 불리게 되었다.

다카무네의 조카인 다카모치[高望]는 현재의 도쿄 북서쪽 60㎞쯤에 있는 히타치[日立]에 지방관으로 와서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이 이 직책을 계승하면서 그의 집안은 히타치 지방의 유력한 무사집안이 되었다.

증손자인 다이라 마사카도[平捋門]는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곧 간토[關東] 지방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다이라 마사카도). 939년에는 간토 남부 지역에 정권을 세우고 수도 교토에 있던 덴노에 대항해 스스로 신(新)덴노라 칭했으나 이듬해에 진압당했다.

1028년 다이라 다다쓰네[平忠常]가 간토 지방을 다시 장악하려 하자 조정에서는 미나모토 요리노부[源賴信]를 보내 진압하게 했다. 3년 뒤 다다쓰네는 항복했고 그 결과 다이라 씨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제56대 세이와[淸和] 덴노의 후손인 미나모토 씨가 간토 지방을 장악함으로써 다이라 씨는 미나모토 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차 집권기

그뒤 덴노와 권력을 공유하면서 10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조정의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있던 후지와라 씨[藤原氏]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11세기 후반 시라카와[白河] 덴노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인세이[院政]라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덴노로서의 의전(儀典)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 시라카와는 덴노의 충성에도 의존하면서 마침내 후지와라 씨에게서 왕실의 권한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라카와 상왕은 이세 구니[伊勢國:지금의 미에 현(三重縣)]를 장악하고 있던 간토의 다이라 씨의 후손인 다이라 마사모리[平正盛]로 하여금, 후지와라 씨가 조정을 지배할 수 있도록 무력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던 미나모토 씨를 무찌르도록 했다.

그 결과 마사모리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시라카와 상황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급속히 출세하게 되었다. 마사모리의 아들인 다다모리[忠盛] 역시 일본 서부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을 소탕하여 덴노를 흡족하게 했다.

다다모리의 아들이자 마사모리의 손자인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가 계속 가문의 토지를 늘리고 조정에서 그 영향력을 높여감에 따라 다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 사이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156년, 덴노에서 물러난 스토쿠[崇德]와 재위중이던 고시라카[後白河] 덴노 사이의 대권(大權)을 둘러싼 분쟁이 기요모리와 미나모토 씨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이를 호겐[保元]의 난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미나모토 씨의 일부 무사들이 배반한 데 힘입어 승리는 기요모리에게 돌아갔다.

3년 뒤인 1159년에 벌어진 헤이지[平治]의 난 당시 기요모리는 호겐의 난에서 자기 편을 들었던 미나모토 씨의 무사들을 무자비하게 없애고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다이라 씨는 왕실의 높은 관직을 거의 독점하고 전국의 절반 가량을 지배했으며 500개 이상의 영지를 소유했다.

1179년 고시라카와가 이끄는 왕실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당했고 고시라카와가 감금됨으로써 기요모리는 실질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그가 교토의 로쿠하라[六波羅]에 살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로쿠하라 정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는 막강한 권력은 휘둘렀지만 왕실제도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결국 다이라 씨가 풍요로운 궁중 생활에 익숙해지고 각 지역의 무사집단들과 접촉이 끊어지게 되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미나모토 씨의 대두

1181년 기요모리가 병으로 죽자 독재적인 다이라 씨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은 미나모토 씨였다.

미나모토 씨의 후손으로 헤이지의 난 때 나이가 어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간토에 거주하면서 다이라 씨에 반감을 품고 있던 무사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미나모토 군대가 교토로 쳐들어오자 다이라 씨는 나이 어린 안토쿠[安德] 덴노를 데리고 교토를 탈출해 일본 서부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셋쓰 구니[德津國]의 이치노타니[一谷:지금의 고베(神戶) 시 서쪽]와 세토나이카이에 접해 있는 사누키 구니[讚岐國:지금의 가가와 현(香川縣)] 야시마 섬[屋島]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다시 서쪽으로 피해 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185년 다이라 씨는 규슈와 혼슈를 가르는 해협의 동쪽 끝 해상에서 벌어진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안토쿠 덴노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때 일본의 초대 덴노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가져왔다고 하는,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본 왕실의 3대 보물 중 하나인 검(劍)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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