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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18,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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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81. 3. 21, 교토 |
국적 | 일본 |
요약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에서 승리하여 지방 무사계급을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하였다. 아버지 다이라 다다모리에 이어 일본 서부 세토나이카이 지역에 있던 강력한 무사가문이자 황실을 지탱하던 주요 군사력인 다이라 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스토쿠 상왕과 그 남동생인 고시라카와 덴노 사이의 권력다툼인 호겐의 난에서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를 편들어 승리를 거두었다. 기요모리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고 요시토모에게 부친의 목을 베어오도록 명령하였다. 요시토모는 권력을 잡기 위하여 1159~60년 겨울 기요모리가 수도를 비운 것을 기회로 삼아 헤이지의 난을 일으켰으나, 기요모리는 대담하고 교묘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167년 중앙정부의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이 된 그는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내고 친인척을 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직접 통치하지 않고서도 왕실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호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에서 승리하여 지방 무사계급을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하였다. 그는 아버지 다다모리[忠盛:1153 죽음]에 이어 일본 서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지역에 있던 강력한 무사가문이자 황실을 지탱하던 주요 군사력인 다이라 씨[平氏]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156년 스토쿠[崇德] 상왕과 그 남동생인 고시라카와[後白河] 덴노 사이에 권력다툼이 벌어져, 스토쿠는 미나모토 다메요시[源爲義]가 이끄는 미나모토 씨[源氏]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일본사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격렬한 난리 중 하나인 호겐의 난으로 이어지자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를 편들어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다메요시의 아들 요시토모[義朝]의 변절도 일조했다.
기요모리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고 요시토모에게 부친의 목을 베어오도록 명령하였다. 요시토모는 거절했으나 결국 미나모토 씨의 다른 사람이 명령을 수행했다. 전공에 대한 자기 몫에 불만을 품은 요시토모는 권력을 잡기 위하여 1159~60년 겨울 기요모리가 수도를 비운 것을 기회로 삼아 정변을 일으켰다(→ 헤이지의 난). 불시에 기습을 당한 기요모리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소집하여 대담하고 교묘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수도로 돌아와 요시토모의 두 어린 아들을 제외한(이 관대한 조치를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만) 모든 적들을 몰살시켰다. 헤이지의 난은 그뒤 여러 설화와 전설의 주제가 되었다.
1167년 중앙정부의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이 된 그는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내고 친인척을 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직접 통치하지 않고서도 왕실을 지배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또 덴노에서 물러나 있던 고시라카와와 처제를 결혼시켰는데, 이들 사이에 난 아들이 세자가 되었다. 1180년 기요모리는 2세된 손자를 안토쿠[安德] 덴노로 올리고 수도를 후쿠하라[福原:지금의 고베]로 옮겼다.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이곳은 세토나이카이의 입구로서 중국과의 교역으로 번창하던 곳이었다.
같은 해에 기요모리가 신임하던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추종자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어 어렸을 때 목숨을 살려주었던 요시토모의 아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외곽 지방의 많은 무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수도에서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수년간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약해진 다이라 군은 요리토모 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요모리는 모든 정무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데 열중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1185년 요리토모가 안토쿠 덴노를 비롯해 다이라 씨의 마지막 후손을 몰살시킴으로써 미나모토 씨가 일본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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