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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육서정온 六書精蘊〉에 의하면 실(室)의 출입구는 호(戶), 당(堂)의 출입구는 문(門)이라 하며 안의 것을 호, 밖의 것을 문, 두짝 문을 단 것을 문, 한짝문을 단 것을 호라고 되어 있다.
또한 출입이 아닌 환기나 채광을 위해 단 것은 창(窓)이라 한다. 그러므로 문호(門戶) 또는 창호(窓戶)라고도 하는데, 근래 한국에서는 문과 창을 구분해 부르고 있다. 그러나 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문짝을 단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짝을 달지 않고도 문이라 불리고 그 기능을 갖는 것이 많은데, 이것은 두 구역이나 공간의 폐쇄기능을 갖지 않더라도 문의 관념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절의 일주문(一柱門)이나 사묘(祠廟)의 홍살문[紅箭門] 등이 그 예에 속한다.
문의 역사는 인류가 건축을 하기 전 구석기시대에 동굴이나 천막생활을 하면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때는 출입을 위한 개구부로서의 개념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움집이나마 건축행위가 이루어지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문의 개념은 출입·채광·채난(採暖)을 위한 시설로 발전했다.
중국의 〈후한서〉나 〈삼국지〉에 보이는 한국에 관한 기록 가운데 "거처를 초가로 무덤같이 만들고 그 위에 문이 있다"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뒤 점차 궁궐건축이 발전하면서 신라시대에 4방문·중문 등의 설치규정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문의 종류는 건축형식·기능·재료·구조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된다(→ 한국의 주택).
건축형식에 의한 분류
① 일주문:절 입구에 세워진 문으로 출입을 제한하기보다는 사역(寺域)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의 형식이 언제부터 발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통일신라시대말과 고려시대에 산지가람이 발달하면서 간소화된 사역의 외문으로 세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유구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통행로 양쪽에 2개의 굵은 기둥을 세워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해 창방과 평방을 돌리고 그 위에 화려한 다포형식(多包形式)의 공포와 도리·서까래 등 가구를 짜서 면적이 넓은 기와지붕을 얹었다.
그러나 범어사·통도사 등의 일주문은 기둥을 일렬로 4개를 세우고 이 위에 가구를 짜 지붕을 얹었다. 따라서 전면에서 보면 3칸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에는 보통 그 절의 대표적인 편액을 달고, 지붕은 맞배나 팔작지붕이며, 단청을 화려하게 해 이곳을 찾는 이에게 신비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② 일각문(一脚門):궁궐·서원·양반주택 등의 내담이나 측담에 있는 협문(夾門)으로 규모가 작다.
역시 기둥은 좌우 2개만을 세우고 기둥 밑에는 짧게 받친 신방목(信防木)을 두고, 문설주와 인방을 짜 그 위에 창방을 걸어 평서까래를 얹고 지붕을 올린다. 특히 기둥을 보강하기 위해 기둥 전후에 용지판을 대거나 버팀기둥을 세우기도 한다. 출입을 제한하는 기능을 담당하며, 반드시 2짝 판문을 단다.
③ 사주문(四柱門):기둥 4개를 세워 만든 것으로 양반주택·사묘·서원 등의 정문 또는 측문·후문으로 사용한다.
보통 2짝의 판문을 다는데 바깥 기둥에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한다. 또한 중간쯤에 기둥과 문설주를 세우고 여기에 판문을 다는 경우에는 6주문이 된다.
④ 삼문(三門):3칸으로 된 문으로 지붕마루를 수평으로 꾸민 것은 평삼문(平三門), 중앙칸의 지붕을 협칸보다 높게 한 것은 솟을삼문이라고 한다. 평삼문은 보통 궁궐이나 사묘 등에 흔히 사용되는데, 판문의 두께가 5~9㎝ 정도이므로 견고하고 육중하다.
그러므로 문 지도리에는 화금(靴金)과 확금(確金)을 달아 마모에 견디도록 했으며, 판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안쪽에 띠목을 대고 여기에 국화정(菊花釘)을 보기 좋게 박았다. 안쪽으로 빗장을 만들어 문짝을 잠글 수 있도록 했으며,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우진각지붕·팔작지붕 등 다양하다. 솟을삼문은 양반주택이나 사묘의 소규모 문으로, 특히 양반주택의 솟을삼문은 행랑채 중간에 만들어 대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지붕은 대개 맞배지붕이며 귀족이 타고 다니는 연(輦)이 넉넉히 드나들수 있도록 지붕을 높게 했다.
이외에 평면에 따라 4칸문과 5칸문 등이 있는데, 이것은 궁궐이나 절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⑤ 중층문(重層門):궁궐·도성(都城)·절 등의 정문으로 2층으로 된 큰 규모의 문이다. 절에는 지금 2층의 문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발굴조사에 의해 경주 황룡사지를 비롯한 몇몇 고려시대 유적의 문이 2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과 도성의 2층문의 예로는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복궁의 근정문(勤政門)이 있고, 도성문으로는 서울의 남대문·동대문, 수원의 팔달문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외침(外侵)을 방어하기 위하여 2층에서 경비도 하고, 유사시에 판문을 닫아 적탄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도성의 문은 특히 밑에 돌로 쌓아 만든 홍예문 층을 하나 더 두고 판문에 철갑을 박아 더욱 튼튼하게 했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향교나 관아에서 누각 밑에 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한 예도 있다.
기능에 의한 분류
① 성문(城門):궁성(宮城)·도성·산성(山城)·읍성(邑城) 등에 세운 문이다.
내성·외성·중성의 문이 있고, 방향에 따라 4대문과 그 사이에 소문(小門)들이 있다. 성문의 기능은 성밖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성을 수호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에 외침의 전망을 볼 수 있는 망대(望臺)의 기능과 사격으로 적을 격퇴하고 침입을 저지하는 기능을 갖는다. 따라서 성문은 중층이며, 홍예석 위에 높게 건물을 세워 항상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물리칠 수 있도록 위치를 설정했다. 그리고 성문 밖에 반달형 평면의 성축을 쌓아 밖에서 성문을 통과하기 전에 일단 이 성축의 개구부를 통과한 다음 성문에서 다시 검색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있는데, 이러한 성문을 옹성문(甕城門)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흥인지문·팔달문에서 볼 수 있으며,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영되었음을 고구려의 국내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울 성곽의 동서남북에는 4대문과 그 사이에 4소문 등 8개의 외성문이 있는데, 현재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이다.
화성은 1796년에 정조에 의해 과학적으로 조영된 도성으로 팔달문과 화서문(華西門) 등 많은 건물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최근 복원공사로 장안문(長安門)을 비롯해 성곽의 전모가 재현되었다. 한편 성문에는 일반적으로 은밀한 출입을 위해 문루가 없이 만든 암문(暗門)이 있으며, 수원성의 화홍문(華虹門)과 같이 물이 흘러 물길을 따라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 수구문(水口門)이 있다.
② 사문(寺門):불교의 교리적 사상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일주문 이외에 금강역사상을 봉안한 금강문(金剛門),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天王門), 불도의 경지를 뜻하는 해탈문(解脫門)·불이문(不二門), 회전문 등이 있다.
이들은 불국(佛國)의 세계를 수호하는 문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뜻하는 문으로 세워진 것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가람배치는 남문과 중문에 금강역사나 사천왕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문은 회랑과 연결되어 중문을 들어서면 완전히 속세와 분리된 폐쇄공간이 되므로 이 시대의 중문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③ 민가(民家)의 대문:일반서민들의 집에 있는 문으로, 농촌의 사립문이나 양반가의 솟을대문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위치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아무곳에나 세우지 않았다.
즉 〈임원경제 林園經濟〉 상택지(相宅志)에 의하면 주실과 대문을 8괘(八卦)의 향으로 나누어 서로 관련시켜 좋고 나쁨을 논했다고 한다. 따라서 민가의 대문은 출입의 기능 이외에 집안에 길흉을 결정하는 상징적인 문이기도 했다.
④ 객사문(客舍門):궐패(闕牌)를 모시고 어명을 받아 출장온 관리들이 잠시 머무는 건물의 정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강릉객사문(국보 제51호)이 있다.
⑤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그 집 앞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문이다. 보통 당사자에 관한 편액을 걸며, 1칸의 작은 문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3칸도 있다.
⑥ 홍살문:어떤 신성한 영역을 상징하는 붉은색을 칠한 문으로 보통 사당이나 능묘(陵廟) 등에 세워진다.
신도(神道) 양측에 구멍난 초석을 놓고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인방을 상·하로 가로질러 기둥에 걸치고, 여기에 수직으로 홍살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다. 이것은 문짝이 없이 상징적인 문은 일주문과 같다. 이와 비슷한 상징의 문으로 일본 신사(神社) 앞에 두는 '도리이'[鳥居]와 중국의 패루(牌樓)라는 것이 있다.
구조와 재료에 의한 분류
돌홍예문과 가구식 건축문, 건물이 없는 암자문과 사립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돌홍예문은 홍예를 하나만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광화문과 같이 중요한 문에는 3개를 나란히 두는 경우도 있고, 중국의 톈안먼[天安門]은 5개로 되어 있다. 이러한 홍예문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불국사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로 보아 통일신라 이후에는 있었던 듯하다. 한편 가구식 문은 삼국시대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성곽도와 평양 안학궁지(安鶴宮址), 백제 부소산성(扶蘇山城), 신라 월성(月城) 동문터 등의 발굴조사로 고증되었다.
이 중 월성의 동문터는 앞면 1칸, 옆면 2칸의 문터임이 밝혀져 건물의 측면에 문을 달아 출입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렇게 건물의 박공쪽으로 출입하는 것은 오래된 고대 형식이다. 이외에 문짝의 형식과 재료에 따라 돌판문·널판문·세살문·꽃살문·철판문·사립문 등이 있다.→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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