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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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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89. 6. 20/28 또는 8. 28, 세르비아 코소보 |
국적 | 오스만 |
요약 오스만 제국의 술탄(1360~89 재위).
재위중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로 급속히 팽창했고 이 지역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정부와 행정방식을 도입했다(→ 비잔틴 제국).
제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서부 트라케를 지나 아드리아노플과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 황제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를 봉신으로 만들었다.
아드리아노플은 에디르네로 개칭되었고, 1362년 무라드의 수도가 되었다. 1366년 사보이의 아메데오 6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비잔틴 국가를 탈환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를 차지했으나 투르크멘은 이듬해 이 지역을 되찾았다.
1371년 무라드마리차 강 키르노멘에서 남부 세르비아 제후들의 연합군을 무찔렀고, 마케도니아의 도시 드라마·카발라·세레스(세라이)를 차지했으며, 사마코브(지금의 사모코보)에서는 불가리아·세르비아 연합군과 싸워 승리했다. 이러한 정복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직접 지배하게 되었으며 비잔틴 외에 북부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도 무라드의 봉신국으로 삼았다(→ 겔리볼루 반도).
1380년대 무라드는 다시 서부 공격을 시작해 1385년 소피아를, 1386년 니시를 차지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토카트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앙카라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한 결혼과 매입 및 정벌을 통해 게르미얀·테케·하미드와 같은 공국들의 영토를 합병했다. 카라만이 지휘하는 투르크멘 여러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연합군을 만들었지만 코니아에서 패배했다(1386)(→ 코니아 전투).
1388년 북부 세르비아 제후들과 보스니아인의 연합군이 플로치니츠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저지했지만, 이듬해 코소보 전투에서 무라드는 이들을 격파하고 전사했다. 무라드 1세의 통치기간중에 오스만 제국 국가제도의 맹아가 싹텄다. 사법대신(kaziasker), 총사령관인 베일러베이(beylerbeyi), 대(大)와지르(재상)와 같은 군사·행정 직위가 구체화되었고, 왕조의 창건자 오스만 1세 일가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직위가 주어졌다.
재너서리와 재너서리를 보충하기 위한 소년 징집제도(devşirme) 또한 무라드의 통치 시기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데브시르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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