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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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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문화대혁명은 당내 숙청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내의 관료적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새로운 정책으로서 마오가 앞장서서 주창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마오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지도층 내의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제거된 인물들 중에는 류사오치도 있었는데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마오가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정치적 수사에 묻혀버렸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의 시황제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알려진 이 운동은 당내 숙청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서, 당내의 관료적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새로운 정책으로서 마오가 앞장서서 주창한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마오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지도층 내의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제거된 인물들 중에는 류사오치도 있었는데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섰던 홍위병들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외치면서 1966년의 여름 정국을 주도했고, 이로 인해 당간부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모든 권위가 도전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오는 1956년 탈집중화가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중앙정부 권력을 선호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상하이의 급진주의자이며 이후에 4인방의 일원이 된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 코뮌을 설립한 직후인 1967년 2월 마오를 방문했을 때 마오는 '우두머리'(지도자)를 철폐하라는 주장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이고 가장 보수반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제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오는 코뮌이 "반혁명을 분쇄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든 당지도부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상하이 코뮌을 해산하고 '혁명위원회'로 대치하라고 명령했다.

전(前) 당간부, 젊은 행동가, 인민해방군 대표들의 세력균형에 바탕을 둔 이 혁명위원회는 마오가 죽은 2년 뒤까지 존속되었다. 처음에는 군부가 위원회를 주로 장악했다. 1969년의 9전대회를 계기로 당재건 작업이 시행되었고, 린뱌오의 사망으로 인해 군부의 영향력은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감소되었다. 1971~72년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주축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벌써 이같은 절충은 실패로 끝났다.

마오가 전문기술의 중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광란적인 정치적 수사에 묻혀버렸고 외국에서 온 것은 모두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으나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를 연상케 하는, 마오 자신에 대한 칭송일색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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