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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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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인터내셔널 이후 마지막 10년 동안 마르크스의 창조적 역량은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스스로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이 시기에 그의 삶은 가정 위주로 바뀌었으며 여전히 독서를 많이 하고 러시아어 학습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그 어떤 저작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정치적 견해도 수시로 바뀌었다.

1875년 자신의 추종자들이 국가권력과의 협력을 통해 사회주의적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다고 신봉하는 페르디난트 라살의 추종자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고타 시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창설하자 그는 〈고타 강령 비판 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을 통해 이들이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은 그의 반대를 묵살하면서 개인적으로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 보수 반동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차르 체제가 타도되기를 바랐다. 이 전쟁으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가 다시 소생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자 그는 러시아 나로드니키의 사심 없는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처럼 테러는 그에게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수단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는 비록 현실정치에서 사실상 한 걸음 물러서 있었지만 엥겔스가 말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여전히 '독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79년 쥘 게드가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연맹의 창설에 즈음해 자신의 자문을 얻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강령의 서문을 구술해 주며 강령의 뼈대를 상당 부분 구체화시켜 주었다. 1881년에는 〈만인을 위한 잉글랜드 England for All〉지(誌)의 헨리 메이어스 하인드먼이 그와의 대담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그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해 노여움을 샀다. 말년의 마르크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면서 알제리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죽음(1881.12.2)과 장녀 예니 롱구에트(1883.1.11)의 죽음으로 비탄에 젖어 살다가 1883년 3월 영국 런던에서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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