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2명의 선수가 다리를 제외한 신체의 한 부분에 힘을 가해 상대방을 바닥에 닿게 하고 보통 등이 바닥에 닿는 자세로 몰아붙이거나 최소한의 시간 동안 어떤 자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
경기는 서서 또는 바닥(또는 매트)에 몸을 대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작한다.
모든 레슬링은 3가지로 분류되는데, 첫째, 경기자들이 벨트와 재킷을 착용하며 주로 그것을 붙잡고 시합하는 벨트앤드재킷 레슬링, 둘째, 정해진 방식으로 상대방을 붙잡고 경기를 시작하는 캐치홀드 레슬링, 셋째, 현대의 국제경기방식으로 정착된 루스 레슬링 등이다.
루스 레슬링에서는 경기자들이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경기를 하며 상대방의 옷을 잡거나 급소를 공격하는 것 등 명확하게 금지된 것을 제외하고 상대선수의 어떤 곳도 잡을 수 있다. 또한 레슬링은 승리의 요건이 되는 브레이크스탠스(끌어당기기나 팔비틀기)·토플링(던지기)·터치폴·핀폴 등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역사
고대
레슬링만큼 오래되고 널리 분포된 스포츠도 드물다.
레슬링은 흔히 극히 지방적인 방식으로 지속되어왔다. 레슬링은 권투와 마찬가지로 육박전에서 시작되어 한 사람이 죽음 대신 항복하는 것으로 끝나는 스포츠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BC 3000년경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미술작품에도 벨트 레슬링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벨트 레슬링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인도의 루스 레슬링은 BC 1500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며 고전적 서사시들인 리그베다·라마야나·미하바라타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BC 700년부터, 일본에서는 BC 1세기부터 루스 레슬링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아마존 강 유역의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전쟁에 대비한 훈련으로 루스 레슬링을 했다. 수단의 누바족은 지금도 해마다 레슬링 축제를 열며, 이때 레슬링 선수들은 BC 15세기초 테베의 묘실화(墓室畵)에서 나타난 것과 흡사한 분장을 한다.
18세기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은 남태평양 제도에서 레슬링하는 것을 발견했다. 문자기록을 남기기 전의 민족들이 벌인 레슬링은 대부분 토플링이 고작이었다. 20세기에 스위스인·아이슬란드인·일본인·카자크인 들이 하는 벨트 레슬링은 BC 2500년에 이집트인이 하던 레슬링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남아메리카·아프리카·몽골·티롤의 고산지대와 같이 전혀 서로 다른 지역에서 행해지는 레슬링 방식이 흡사한 것도 흥미롭다.
레슬링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였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다니던 팔레스트라라는 레슬링 훈련장은 그들의 사회생활의 구심점이었다. 그리스의 화병이나 주화에는 레슬링 삽화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 전체를 통해 흔히 볼 수 있으며 삽화에 나타난 스타일은 루스 레슬링이었고, 선수들은 그리스의 다른 운동선수들처럼 발가벗은 채 겨루었음을 알 수 있다. 레슬링은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 가운데 특히 장례식 경기에서 흔히 나타나며 BC 776년부터 올림픽 대회의 종목이 되었다.
고대 올림픽 대회에는 3판2승제의 토플링 경기와, 레슬링과 권투를 혼합한 것으로 한 사람이 항복함으로써 끝나는 판크라티온의 2개의 레슬링 선수권전이 있었다. 판크라티온에서는 발로 차기와 목조르기가 허용되었다. 똑바로 서서 하는 레슬링도 고대 5종경기의 하나였으며, 한 선수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방식이었다.
유명한 그리스의 레슬링 선수들로는 크로톤의 밀론, 시크욘의 소스크라테스, 타소스의 테오게네스, BC 564년 타이틀을 방어하다 죽은 필가리아의 아라치온 등을 들 수 있다. 그리스인이 아닌 에트루리아인들의 묘실화에서도 발가벗고 레슬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에서는 코모두스 황제와 막시미두스 황제가 레슬링 선수였지만 그리스에서처럼 대중적이지 못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AD 800년경까지는 레슬링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중세
페르시아의 이슬람교 통치자들이 800년경 투르크의 용병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을 때 용병들은 루스 레슬링의 일종인 코레시를 전래시켰다.
코레시는 길고 꼭 끼는 바지를 입은 선수들이 재빠르게 상대의 등을 바닥에 닿게 하면 끝나는 것으로, 점차 투르크가 이슬람교 지역 전체를 통치하게 되면서 이러한 레슬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후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몽골식 레슬링이 들어왔고, 이 몽골식 레슬링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널리 보급된 결과 오늘날 레슬링이 이란의 국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벨트 레슬링 스타일인 일본의 스모[相撲]는 710~1185년 황실의 후원에 힘입어 관객 동원력이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인기를 끌었다(→ 스모). 본래 한쪽이 항복을 해야만 끝나는 잔인한 경기였던 스모가 이 기간에 직경 4m의 원형경기장 밖으로 상대를 밀어내기만 해도 승리하는 토플링 스타일로 형식화되었다.
바쿠후 시대[幕府時代]에 들어와 스모의 공개시합이 금지되고 집권무사계급인 사무라이[侍]들의 무술대회가 이를 대신했다. 1600년경 무사들이 대부분 공직생활에서 물러나고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들이 스모를 장려함으로써 그후 스모는 직업적인 운동이 되었다. 19세기에 사무라이의 무술로부터 또 하나의 일본식 레슬링인 유도가 생겨나 크게 발전하여 20세기 후반 국제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레슬링은 중세에 유럽 전역에서 여러 가지 스타일로 생겨났다. 앵글로색슨족을 포함한 게르만족과 켈트족이 로마인들과 접촉하기 전부터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기록상 영국 최초의 레슬링 시합은 런던에서 열렸다.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에서는 일반적으로 콘월과 데본(→ 콘월 레슬링)이라고 했던 재킷 레슬링이 늦어도 4~5세기에 시작되었다(→ 콘월 레슬링).
많은 사람들은 마을의 풀밭으로부터 경기장에 이르는 어디에서나 레슬링을 즐겼으며 전국 규모의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는 상으로 양을 받았다.
신성 로마 제국시대에는 기사들에게 레슬링을 무술로써 가르쳤으며 귀족들은 '30년전쟁'이 일어난 1618년까지 직업적인 레슬링 교사를 고용했다. 교재는 인쇄술이 소개되기 전에는 필사본의 형태였다. 아이슬란드에는 1,000년 전 벨트 레슬링 스타일인 글리마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스위스의 벨트 레슬링인 슈빙겐은 13세기에 시작되었다. 1526년 몽골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개한 몽골의 루스 레슬링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근대 초기 영국의 헨리 8세와 찰스 2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등은 레슬링을 적극 후원했다.
근대
18세기부터는 박람회나 극장, 서커스에서 레슬링 선수나 힘센 사람들이 줄을 지어 유망 신인에게 도전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는데, 그런 도전을 물리치고 레슬링계의 제1인자가 된 최초의 인물이 18세기 런던의 토머스 토팸이었고, 마지막 인물이 20세기까지 명성을 유지한 독일 태생의 국제적인 거물 유진 샌도우였다.
1800년대초 독일 정부는 체조협회의 체조훈련의 일환으로 레슬링을 채택했다. 미국에서는 레슬링이 변경지대의 스포츠로 인기를 끌었는데(에이브러햄 링컨도 유명한 지방 레슬링 선수였음), 경기는 로프가 둘러쳐지지 않은 곳에서 한 선수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는 방식이었다.
19세기 후반에 2종류의 레슬링이 발전해 결국 국제 레슬링계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그레코로만형 레슬링과 자유형 레슬링이다.
처음 프랑스에서 널리 보급된 그레코로만형은 그것이 고대 레슬링의 한 형태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실제로 고대 레슬링에 관한 삽화는 많지만 문자로 기록된 것은 전혀 없다. 그레코로만형은 상대의 허리 위만 잡을 수 있으며 상대가 쓰러질 때 다리를 걸 수 없다. 본래 이것은 프로 스포츠로 시작되어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를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지만, 1896년 부활된 올림픽 대회의 종목으로 채택된 후 1900, 1904년을 제외하고 올림픽 대회의 정식종목이 되었다(캐치애즈캐치캔 레슬링).자유형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보급되었는데, 프로 스포츠로 시작하여 1888년 아마추어 체육협회의 인정을 받은 후 아마추어 스포츠로도 널리 행해졌다.
자유형은 1904년 올림픽 대회 종목으로 채택된 후 1912년을 제외하고 올림픽 대회 때마다 정식종목으로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권투와 마찬가지로 체급 구분이 없었지만(제1회 올림픽 대회에서는 헤비급이 유일한 체급이었음),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체급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자유형 레슬링). 유명한 프로 레슬링 선수 가운데는 그레코로만형의 아마추어 선수로 시작하여 1900년에 프로로 전향하면서 자유형 레슬링 선수로 활약한 러시아의 게오르그 하켄슈미트가 있다.
그는 1908년까지 세계 챔피언을 지냈으나 미국의 프랭크 고치에게 1908, 1911년 계속 패했다. 권투와의 인기경쟁에서 이미 뒤지던 프로 레슬링은 1913년 고치가 은퇴하면서 진지한 스포츠로서의 생명은 끝났다. 그후 미국에서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관중이 늘었고 이어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더욱 늘어나기는 했으나 단순한 쇼로 전락했다. 교묘하게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된 승자들은 실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로모터들의 재정적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레슬링의 술수는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활기차고 거칠어졌다. 영국의 랭커셔에서 시작된 자유형에서는 신체의 어느 곳을 잡아도 되지만 목을 조르거나 급소를 공격할 수는 없다.
성장
개요
서양에서 프로 레슬링 단체의 조직화 운동은 전혀 없었다. 아마추어 단체는 19세기초부터 지방과 전국 규모로 조직되었고, 19세기 후반 지역간 경기를 갖게 되었으며 1911년 국제 아마추어 레슬링 연맹(FILA)이 조직되었다(1920 개편). FILA에서는 올림픽 대회를 비롯한 국제대회의 규칙을 제정, 1951년부터 세계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선수권대회와 세계 자유형 레슬링 선수권대회를 주관해왔다. 한편 1951년 조직된 국제유도연맹은 세계선수권대회(1956)와 올림픽 대회(1964)를 후원해왔다.
20세기 레슬링의 성장
그리스 시대 땅바닥에서 하던 레슬링이 전성기에는 아마추어 선수들은 매트에서, 프로 선수들은 권투와 같이 높게 로프를 둘러친 링에서 하게 되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지만 아마추어 레슬링의 가장 큰 변화는 20세기에 있었다.
초기의 레슬링은 휴식 없이 계속해서 경기를 벌였으며 3판1승이나 3판2승으로 치러졌고 시간제로 하기도 하며 때로는 시간을 제한하지 않기도 했다. 아마추어 레슬링은 3분 3회전으로 제한되었으며 그 규정이 1967년부터 모든 국제대회에 적용되었다. 또한 폴에 이르지는 않았어도 한 선수가 상대선수를 홀드로 제압하거나 폴의 위험에 빠뜨리면 점수를 주는 제도가 마련되어 무승부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레코로만형은 특히 허리 위만 잡을 수 있고 다리를 잡는 홀드를 할 수 없으므로 일단 선수들이 매트에 있게 되면 지루하게 시간을 끄는 경향이 있었다. 1912년 올림픽 대회에서는 핀란드의 두 선수가 그레코로만형 경기에서 승패가 나지 않은 채 6시간 동안 경기한 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레슬링의 인기가 갈수록 높아졌다.
자유형 및 그레코로만형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레슬링의 한 종류로 삼보가 있다. 이것은 재킷 레슬링의 일종으로 소련의 아나톨리 하를람피예프와 그밖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전통적인 레슬링 스타일을 연구하여 합성해낸 것이다. 삼보는 소련·불가리아·일본에서 대중화되었으며 1964년 FILA의 공인을 받았다.
삼보에서는 한 선수가 상대선수를 완벽하게 던져 그의 등이 바닥에 닿게 함으로써 승자가 되며, 만일 두 선수가 다 같이 매트에 넘어지면 한 선수가 항복함으로써 시합이 끝난다. 삼보는 유도 및 몽골의 레슬링과 흡사하며 시합은 3분 3회로 진행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파르타인들이 젊은 여자들에게 레슬링을 가르쳤고 제노비아와 같이 전설 같은 여자 레슬링 선수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20세기에 여자 레슬링이 생긴 것은 여자 복싱과 마찬가지로 눈요기감으로서일 뿐이다.
한국의 레슬링
한국에서는 1941년 4월 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 레슬링 선수권대회가 개최되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 이전인 1939년 일본에서 열린 범태평양경기대회에 조순동이 참가했으나 레슬링의 보급이 활발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후 1942년 4월 서울에서 국내 선발 팀과 일본 유학생 팀 간에 경기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1946년 3월 조선 아마추어 레슬링 협회('대한 아마추어 레슬링 협회'의 전신)가 결성되었으며, 1948년 8월 국제 아마추어 레슬링 연맹에 정식 가입했다.
역대 주요경기에서 거둔 성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4회 런던 올림픽 대회에 2명이 참가하여 5·6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대회에서는 52㎏급의 이상균이 4위, 1964년 제18회 도쿄 올림픽 대회에서는 자유형 52㎏급의 장창선(張昌宣)이 2위, 57㎏급의 최명길이 5위, 70㎏급의 정동구가 6위를 차지하는 등 세계무대에서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후 1966년 토론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플라이급에서 1위, 57㎏의 장경무가 5위, 70㎏의 정동구가 5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아시아 경기대회 사상 최초로 62㎏급의 양정모(梁正模)가 우승을 차지했다.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에서는 올림픽 대회 참가 사상 처음으로 자유형 패더급(62㎏)의 양정모가 대망의 금메달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으며, 52㎏의 전해섭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는 레슬링이 올림픽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우리나라에 안겨준 종목으로 남긴 대회였다.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62㎏급의 김원기(金原基)와 자유형에서 68kg급의 유인탁(柳寅卓)이 각각 금메달을 따낸 것을 비롯해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의 성적을 거두었다.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에서는 금메달 9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74㎏급의 김영남(金永南)과 자유형에서 82㎏급의 한명우(韓明愚)가 각각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를 기록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52㎏급의 안한봉(安漢奉)과 자유형에서 74㎏급의 박장순(朴章洵)이 금메달을 땄으며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1개씩 획득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레슬링 강국으로 부상했다. 심권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회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한국 레슬링 사상 첫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회에서는 정지현이 그레코로만형 60㎏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스포츠 일반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