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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0(~1543경), 잉글랜드 데번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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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6. 1. 28, 파나마 푸에르토베요 인근 해상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요약
1577~80년 세계일주 항해를 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가장 명성을 날린 항해가였다.
궁핍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일찍 바다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인도제도 항해에 부선장으로 참가하면서 탐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577년 드레이크는 마젤란 해협을 통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그 너머의 해안을 탐사하기 위한 원정대의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1580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템스 강 어귀 데트퍼드에 정박한 '더 골든 하인드호'에 몸소 올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개요
1577~80년 세계일주 항해를 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가장 명성을 날린 항해가였다.
초기생애
베드퍼드 백작 2세인 프랜시스 러셀 경의 영지 크라운데일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베드퍼드 백작 2세의 차지농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평신도 설교사였으며 이는 드레이크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에 대한 드레이크의 혐오감은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연유했을 뿐만 아니라 1549년 발생한 가톨릭교도의 반란중에 그의 가족이 잉글랜드의 서부지방을 떠나야 했던 어린시절의 경험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그때 가족들은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로 가 원래 살던 시골 오두막을 처분한 돈으로, 템스 강 어귀 남쪽 제방의 채텀 근처에 정박해 있는 낡은 해군 폐선을 장만해서 살았다.
드레이크가 서부지방의 데번에서 계속 지냈더라면 그는 아마 자작농이 되었을 것이다. 궁핍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일찍 바다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3세쯤 되었을 때 북해 연안 항구들을 정기운항하는 작은 선박에서 견습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세상에서 파도가 가장 거친 곳에 속하는 북해 연안을 항해하면서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험난한 해상조건에서 소규모 선박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배웠으며, 이때 터득한 항해지식은 평생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일하던 배의 늙은 선장이 죽으면서 그에게 배를 물려주어 드레이크는 마침내 자신의 배를 갖게 되었다.
데번셔 플리머스의 유력가문으로 당시 신대륙과의 무역을 시작하고 있었던 호킨스가(家)와 관계를 맺게 된 행운이 없었더라면 드레이크는 아마도 평생을 연안무역에 종사하며 보냈을 것이다. 드레이크가 결코 잊지 못하는 그 신대륙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스페인에 하사한 것이었다. 23세쯤 되었을 때 북해의 좁다란 수평선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드레이크는 자신의 배를 처분하고 호킨스 가문의 선단에 참가했다. 이로써 드레이크는 장차 자신에게 위대한 명성과 막대한 재산을 안겨줄 대서양의 넘실대는 파도와 육지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서인도제도 항해
서인도제도 항해에 부선장으로 참가한 드레이크는 스페인 사람들을 이때 처음으로 접했으며, 스페인 제국에서 스페인인들이 외국인들을 대하는 방식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일례로 드레이크 일행의 뱃짐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압류당하기 일쑤였다. 훗날 드레이크는 자신과 동료들이 겪었던 일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는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앞으로 바로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2차 서인도제도 항해는 존 호킨스와 함께 했는데 이 항해는 멕시코 연안 산후안데울루아에서 스페인측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많은 선원들이 사망해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드레이크는 소형 선박 '주디스호'를 지휘해 영국으로 귀환하면서 스페인과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복수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다졌다. 제2차 항해는 재정적인 면에서 실패였지만 드레이크는 자신이 탁월한 뱃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명성을 드높였다. 당대의 중요인물들을 비롯해 여왕 엘리자베스 1세까지도 드레이크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여왕 자신도 신대륙 무역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그는 '이전의 항해에서 입은 손해를 만회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소형 선박을 이용, 2차례나 서인도제도 탐험을 실시했다.
1572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스페인 국왕의 영토에서 약탈을 해도 된다는 승낙을 받고서 70t급의 '파샤호'와 25t급의 '스완호' 2척을 지휘해 아메리카 대륙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유일한 야심은 파나마에 있는 중요한 도시 놈브레데디오스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를 공격하면서 드레이크 자신도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일행은 엄청난 재물을 노획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파나마의 이스트무스를 지나 계속 나아갔으며 한 산등성이 정상에 올라서서 처음으로 태평양을 목격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태평양은 스페인 선박 이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드레이크가 전지전능한 하느님께 "한 번만이라도 영국 배를 타고 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시간과 목숨을 달라"고 간청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이 탐험으로 그는 부와 명성 모두를 손에 넣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불행히도 그의 귀국과 때맞춰 엘리자베스 1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사이에 일시 휴전이 이루어졌다. 여왕은 스페인 제국 영토에서 드레이크가 거둔 성공에 기뻐했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항해술에는 뛰어났으나 정치에는 무관심했던 그는 때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작은 함대를 이끌고 아일랜드로 가 에식스 백작 밑에서 일했다. 당시 에식스 백작은 싸움으로 피폐해진 아일랜드에서 폭도를 진압하던 중이었다. 이 기간이 드레이크의 생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인데 그는 2년이 경과할 때까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세계일주 항해
1577년 드레이크는 마젤란 해협을 통해 남아메리카 대륙을 돌아 그 너머의 해안을 탐사하기 위한 원정대의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 원정의 목적은 스페인 영향권에 있는 남쪽 지역의 주민들과 교역협정을 타결짓기 위한 것이었으며, 가능하다면 멀리 남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다고 풍문으로 전해지는 미지의 대륙까지 탐험하는 것이었다. 이 원정은 엘리자베스 1세가 직접 지원한 것으로 드레이크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드레이크는 여왕으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손해를 입히는 것뿐만 아니라, 여왕의 이권과 함께 드레이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얻었다.
이때 드레이크는 처음으로 여왕을 대면했으며 여왕으로부터 직접 "내가 당한 손해만큼 스페인 국왕에게 기꺼이 복수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12월 5척의 소형 선박에 200명 남짓 되는 사람을 이끌고 항해를 시작해 1578년 봄 브라질 해안에 당도했다. 원정함대의 기함인 '펠리컨호'는 약 100t에 불과했는데 드레이크는 나중에 이 기함의 이름을 '더골든하인드호'라고 바꾸었다. 이 배는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의 영역 안에서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충분치 못해 보였다.
남아메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드레이크는 자신에 항거하는 모종의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주모자인 토머스 도티를 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그는 항상 규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으며, 탐험에 참가한 사람 모두가 자신에게 확고한 충성을 하지 않는다면 추호도 탐험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식량저장선 역할을 하던 2척의 배를 포기하고 식량을 다른 배에 옮긴 후 계속 항해해 1578년 8월 21일 마젤란 해협에 진입했다. 해협을 통과하는 데 16일이 걸렸으며 마침내 드레이크는 태평양을 2번째 보게 됐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영국 선박의 갑판 위에서 태평양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드레이크는 "하느님이 맞바람과 견디기 어려운 폭풍우를 내리는 것을 보니 우리에게 등을 돌렸는가 보다"고 기록했다. 강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드레이크가 탄 기함과 제2지휘함이 서로 떨어졌으며, 기함을 찾는 데 실패한 제2지휘함은 드레이크의 배가 침몰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따라서 끝까지 태평양으로 진입해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항해해 올라간 선박은 드레이크가 탄 기함 1척뿐이었다. 그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해안을 따라 항해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이 거의 방심하고 있었으며 적대국의 선박이 자기들의 해역에 들어와 있다는 점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드레이크는 발파라이소에서 식량을 노획했으며, 지나가던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상당한 재물을 보유한 선박 2척을 나포했다. '더 골든 하인드호'가 세계일주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 남아메리카를 떠날 무렵에는 금·은괴와 스페인 주화, 진주 및 값비싼 보석들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는 서쪽으로 항해하기에 앞서 대서양으로 되돌아가는 북서항로를 찾아내기 위해 벤쿠버와 나란하게 북위 48˚ 방향으로 항로를 틀었다.
매서운 추위를 만나게 되자 그는 남쪽 해안으로 항해해 나가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정박했다. 그 주변지역을 뉴알비온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엘리자베스 1세의 소유로 정했다. 아메리카 대륙 북쪽으로 통하는 항로를 찾으려 했던 드레이크는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지금의 캐나다 서부해안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1579년 7월 태평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항해해 갔으며 68일이 지난 후 한 제도(아마 팔라우 제도인 듯함)를 발견했다.
거기서부터 필리핀으로 계속 항해했으며 필리핀에 당도해서는 식수를 채우고 다시 몰루카 군도를 향해 떠났다. 몰루카에서 드레이크는 그 지역 통치자에게서 융숭한 대우를 받았으며 영국인들에게 향료교역권을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드레이크의 원양 항해술은 탁월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태평양 바다에서 배가 좌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암초에서 헤어나왔으며, 자바에 잠시 기항한 뒤 희망봉을 향해 인도양을 가로질러 항해를 계속했다.
마젤란 해협으로 들어선 지 2년 만에 '더 골든 하인드호'는 지구를 1바퀴 돌아 다시 대서양으로 들어섰다. 처음 출발할 때 승선했던 100명의 선원 가운데 56명만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1580년 9월 26일 마침내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탄 배는 플리머스 항에 들어왔다. 이 배에는 보물과 향료가 가득 실려 있었으며 드레이크의 몫은 평생을 써도 좋을 만큼의 재산이었다.
그는 자신의 배로 세계일주를 한 최초의 선장이었으며(포르투갈의 페르난두 마젤란은 세계일주 항해를 끝마치기 전에 죽었음) 태평양과 인도양, 남대서양을 항해한 최초의 영국인이 되었다. 스페인측은 드레이크가 스페인 제국 해역에서 해적질을 했다고 비난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템스 강 어귀 데트퍼드에 정박한 '더 골든 하인드호'에 몸소 올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한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플리머스 시장 시절
1581년 드레이크는 플리머스 시장이 됐으며 매사에 늘 그랬듯이 철저하게 플리머스 시장직을 수행해 나갔다. 그는 플리머스에 급수시설을 마련했는데 이 시설은 그후 300년 동안 이용됐다. 1585년 데번셔 지방의 세도가인 조지 시드넘 경의 상속녀 엘리자베스 시드넘과 재혼했다. 첫번째 부인인 콘월 출신의 메리 뉴먼과 1569년 결혼했지만 1583년에 사별했었다. 플리머스에서 수㎞ 떨어진 곳에 근사한 시골저택(버클런드 애비라는 이 저택은 현재 국립박물관이 되었음)을 사들였다. 드레이크의 유일한 비극은 2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1명의 자식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민적 영웅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기에 그는 탐험대에 참가할 지원자들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들은 일반대중들과 달리 드레이크의 명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군사령관 리처드 그렌빌 경이나 항해가이자 탐험가인 마틴 프로비셔 경과 같이 출신배경이 좋은 사람들은 드레이크를 매우 싫어했다. 드레이크는 미천한 태생의 벼락출세자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서부지방의 생활양식과 억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궁정에서의 우아함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렌빌 경으로부터 버클런드 애비를 사들일 때 그렌빌 경이 결코 이 시골저택을 그에게 직접 팔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개인을 내세워 은밀히 사들였었다. 그는 당시 귀족들의 따가운 눈총에 마음을 쓰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는 여왕으로부터 호감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사실은 곧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1585년 여왕은 그를 25척의 배로 구성된 함대의 지휘관에 임명했던 것이다.
다시 스페인과 싸움이 붙어 스페인 해양제국에 가능한 한 큰 타격을 입힐 것을 명령받은 그는 케이프버드 제도의 산티아고를 점령하고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 플로리다의 세인트오거스틴, 산도밍고(히스파니올라의 산토도밍고) 등의 도시들을 점령·약탈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서인도제도에서 그가 거둔 승리의 여파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드레이크로부터 당한 피해로 인해 스페인의 체면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스페인은행이 파산했으며 베네치아은행(펠리페 2세가 주요 채무자임)도 파산 직전의 상황에 처했다. 또한 독일의 아우그스부르크은행은 스페인 왕실에 더이상의 대출을 거절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아래서 주요 장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그때까지 결코 드레이크의 명성을 인정하지 않던 버글리 경마저도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스페인 국왕에게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적함대 격파
1586년경 펠리페 2세가 이른바 '영국에 대한 보복 계획'을 위해 함대를 준비중에 있으며, 또한 교황 식스투스 5세로부터 이단의 섬나라 영국을 정복, 로마 교회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만들라는 축복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한편 드레이크는 여왕에게서 '영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중인 스페인을 응징'하는 전권을 위임받았다. 이듬해 드레이크는 약 3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공격, 엘리자베스 여왕이 드레이크에 대해 가졌던 신뢰가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카디스 항을 공략, 36시간 만에 수천t에 달하는 선적화물과 보급품을 파괴했는데 파괴된 이 물품들은 모두 스페인 무적함대를 위해 사용될 물자였다.
드레이크가 이를 두고 "펠리페 2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행위"라고 비웃었던 것처럼 이 공격의 결과 스페인측은 영국 침공 함대의 발진을 1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풍부한 재력을 이용해 1588년 7월 영국해협에 무적함대를 등장시켰다. 하워드 경이 영국 해군 제독에 임명되고 드레이크는 부제독에 임명됐다. 그러나 정작 전세를 일순간에 결정지은 것은 바로 드레이크의 돌격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스페인 선박 1척을 직접 나포했다. 또한 화공선을 동원, 스페인 무적함대가 대피해 있던 칼레에서 무적함대를 격퇴시킨 장본인도 바로 드레이크였다.
프로테스탄트인 드레이크의 마음이 기쁘게도 당시 '신의 바람이 불어와서'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거의 대부분이 난파했다. 드레이크는 200년 후에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필적하지 못할 인기를 얻은 영국의 영웅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이 그에게 답지했으며 그는 시(詩)와 선전인쇄물 등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말년
그러나 드레이크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가 주도한 포르투갈 원정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또한 마지막 항해가 됐던 1596년의 서인도제도 스페인 속령 원정도 함대에 참가한 다수가 열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드레이크 자신도 이때 병사해 푸에르토베요(지금의 파나마 포르토벨로)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살아 생전에 드레이크보다 더한 명성을 얻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역사가 존 스토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항해에 관한 모든 면에 있어서 능숙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완벽한 기억력과 뛰어난 관찰력, 타고난 웅변력의 소유자였다. ……간단히 말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티무르 렌크(태멀레인)가 얻었던 것과 같은 명성을 드레이크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떨친 것이다."
후일 새뮤얼 존슨 교수는 드레이크의 성격과 용기에 관해 찬사를 바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영국 주재 스페인 대사가 말한 것처럼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드레이크는 '미지의 신대륙에서 날뛰는 도적 우두머리'였다. 드레이크는 '작은 키에 튼튼한 신체를 갖추고 있었으며 둥근 얼굴과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에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둥근 눈과 크고 선이 분명한 준수한 얼굴, 그리고 밝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신앙심 깊은 영국국교도이며 유능한 사업가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뱃사람이었다. 그는 팽창주의를 추구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영국의 미덕 가운데 많은 부분을 구현시킨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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