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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을의 수호·안녕·풍요를 위해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민간의례의 하나.
역사
일반적으로 동제의 원형으로는 고대사회의 제천의례가 거론되고 있다. 즉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실린 군취가무의 고대적 제천의례를 근현대 동제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제는 고려말·조선초의 본격적인 자연 마을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의 생산력 발전에 따른 자연마을의 형성 및 그에 따른 마을 단위 의례의 변화에서 오늘날 동제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전통적으로 사불(祀佛)행사였던 향도(香徒)조직 및 그 의례의 변화이다. 향도는 본래 고려시대의 거군적(擧郡的)인 사불행사였으나 고려말·조선초에 이르면 보다 소규모의 마을단위 조직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다. 이중 매향(埋香)의례를 이 조직이 수행했다는 사실이 매향비(埋香碑)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매향의례는 향나무를 묻어 미륵과 만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희망하는 한편 마을의 안녕을 빌던 일종의 동제였다.
향도는 공동체 수호신앙조직이었으나 조선초 이래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지배계층에 의해 음사(淫祀)로 지탄받는 한편, 조선 중기 향약의 보급과 더불어 재지사족(在地士族) 중심의 동제에 편입되는 등 심한 변질을 겪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촌락 분화가 보편화되고 자연 마을 중심의 운영구조가 정착되면서 상민 중심의 공동제의가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현재 볼 수 있는 동제는 이같은 역사적 변모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동제에 유교적 제사의 내용이나 형식이 심층에까지 침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이나 근래의 동제에 대한 현지조사보고를 통해 시기·명칭·동신·신당(神堂)·절차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제는 대개의 경우 정월, 특히 대보름에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때로는 2월이나 5월, 10월 등에 지내기도 하나 많지 않다. 5월에 지내는 경우는 주로 밭농사지역인 강원도 등 동북부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10월 상달에 지내는 경우는 추수 후라는 시기로 비추어볼 때 고대부터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
명칭은 '동제'가 압도적이고, 그외에 동신제·산신제·산제·서낭제·당제·당산제·부군당·용왕제 등으로도 불린다. 동제는 유교식 제사가 도입된 이후 많이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산신제·서낭제·당제·용왕제 등이 보다 고형을 간직한 명칭이다.
당제는 특히 영남과 호남에서, 부군당은 주로 서울 및 인근 지역에서 많이 쓰이는 명칭이다. 또한 이들은 많은 경우 '굿'으로도 불려지는데, 이는 엄숙한 유교식 제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에 의해 일종의 공동체적 축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경우 동제는 단순한 유교식 제사로 끝나지 않고 동민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굿으로 진행된다. 일제강점기 이래 최근까지도 동제를 '부락제'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조선의 풍습을 미신으로 또는 소비적인 형태로 격하시키려는 일제의 의도적인 명칭 조작이었다.
한편 동제의 명칭은 대개의 경우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봉신의 명칭에서 유래하며 '산신'이 가장 대표적인 동신이다. 또 서낭신은 고대로부터의 적석 풍습과 연결되지만,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되어 조선초 전국적으로 장려되었던 성황제로 변모된 다음 조선 중기 이후 다시 민간신앙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신 중에서 특이한 경우로는 임경업·최영·단종·남이·공민왕 등 인물신이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자신들의 억압받는 삶을 동일시한 민중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영남지역에서는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시조인 골맥이를 동신으로 모신다.
신당은 신목·돌무더기·당집·굴당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자연상태 그대로의 신목이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거목숭배와 연결된다. 또 신목 밑에 돌제단을 마련한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솟대·돌무더기·서낭당과 더불어 위치하기도 한다. 서낭당은 강원도를 비롯한 산간지방에 흔한데, 돌로 신당을 꾸미고 그 안에 제단을 마련하기도 한다. 당집은 짚으로 만든 것이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고형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초가나 기와집이며, 최근에는 슬라브나 시멘트로 지은 경우도 많다. 당집 안에는 대개 동신을 상징하는 신상이나 위패가 모셔진다. 고형으로는 신체를 상징하는 방울·쇠말 등이 모셔지는 경우도 있다.
절차
동제는 대개의 경우 대동회의·제의·대동놀이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제일 7일 전이나 보름 전에 마을의 청장년 전부가 모여 동제 준비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마을의 대소사에 대해 논의하는 대동회의를 연다. 이때는 전년의 마을 공동사안에 대해 결산하기도 하며 다가오는 해의 각종 공동 관심사에 대해 토론도 한다.
동제에 관해서는 제관의 선출, 제물 준비를 위한 기금 마련 등 동제 진행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제관으로는 대개 제주·축관·집사 등이 선임되는데, 특히 제주의 경우 자신이나 집안에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서 생기복덕을 보아 선출한다. 제관이 선출되면 그때부터 마을 전체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신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쳐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특히 제관은 부정이 타지 않도록 각종 금기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영남이나 호남 지방의 경우 공동기금 마련을 위해 지신밟기를 하기도 한다. 제일 전에 마을에서 추렴한 공동기금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당일이 되면 제관들이 신당에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대개의 경우 제물의 진설(陳設)·헌주·독축·소지·음복 등 유교식 절차를 따른다. 제사를 끝낸 후 제물을 거두어 제주집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음복을 하며, 때로는 마을 공동사안에 대해 회의를 열기도 한다. 해안지방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에서 이러한 유교식 제사 후에 무당이 굿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 제사나 굿이 끝난 후, 또는 그 다음날에는 대동놀이가 벌어진다. 대동놀이의 대표적인 예로는 줄다리기·풍물굿의 뒷굿·석전 등이 있다. 이는 집단적 신명으로 마을 내의 갈등을 풀고 집단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향
동제는 기본적으로 산신·농신·조상신 등 생산의 풍요나 재액의 방지 및 마을 수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신격에 대한 제사이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제천의례가 고려말 이후 마을단위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생산력의 발달과 마을공동체의 형성 등에 따라 좀더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능신에 대한 제의로 변모된 것이다. 또한 동제는 단순한 제의로서만이 아니라 대동회의·지신밟기·대동굿 등을 통해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민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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