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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양의 도를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논리. 유교적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을 수용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한말에 전개된 동도서기론은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내외적 위기라는 시대배경 하에서 형성된 동도서기사상은 개화사상과 함께 국내외의 위기를 부국강병과 근대화의 실현을 통한 국가독립의 확보를 통해 극복하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한국에서의 동도서기적 개화사상은 동도 위에 서양의 과학·군사 기술을 수용하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독립의 확보에 있었다.
개요
이 논리를 한국에서는 '동도서기론', 중국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일본에서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으로 표현했다.
동도서기론의 이념적 의미
동도서기론은 유교적 질서(東道)를 지키는 가운데, 서양의 우수한 군사·과학기술(西器)을 수용함으로써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여기에서 도(道)와 기(器)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理)가 우위에 서게 된다. 따라서 중점은 '도'(道)에 두게 되므로 기존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동도서기론과 개화사상
한말에 전개된 동도서기론은 그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개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도서기사상과 개화사상은 근원적으로 북학파의 이용후생(利用厚生)·부국강병 사상을 모체로 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와 국가독립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개화정책의 노선과 그 추진방법 등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두 사상의 관계를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동도서기사상을 개화사상의 한 분파로 이해하여 동도서기사상과 개화사상이 각각 점진적·급진적 개화사상으로 분화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개화사상을 전후 발전단계로 파악하여 동도서기사상이 변법적 개화사상으로 발전해간다고 보기도 한다. 첫째, 두 사상을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는 동도서기사상의 연원을 박규수(朴珪壽)에게서 찾고 1880년 초기에 사회사상으로 확립되었다고 본다.
그 핵심적 내용은 "유교적 윤리질서와 전통적 정치사회제도(東法)는 고수하고 서양의 군사기술·과학기술만 수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체제에 대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으로 전반적인 혁신을 전제하지 않은 개혁론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사회 건설이라는 당시의 민족적 과제의 수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에 반해 개화사상은 1870년대에 사회사상으로 성립되어 갑신정변에서 확립된 것으로 보는데, 동도서기와는 달리 "서양의 정치·경제·사회제도(西法), 서양의 사회윤리 내지 기독교(西道)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하려고 한 것"으로, 즉 서기·서법·서도가 종합되었던 구미 문명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것을 개화운동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 볼 때 개화사상은 개화기와 같은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현실에 대한 대응자세로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이를 이룩하기 위한 부국강병을 지표로 한 사상체계가 된다. 따라서 이 두 사상은 경제적 지향에 있어서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변혁함으로써 민족국가를 수립하고 독립을 유지하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으나, 신국가를 구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제적 형태를 지닌 봉건국가의 유지 대 입헌군주국가의 수립"이라는 현저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동도서기사상에 입각해 정책적으로 변혁을 시행한 것이 '광무개혁'(光武改革)이며, 개화사상에 입각한 것이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 등이었다.
둘째, 동도서기론을 개화사상의 일부로 보는 경우는 개화파를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누고, 온건개화파가 '동도서기적 양무론'을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이들 온건파는 대외적으로는 '예'(禮) 질서에 의한 화이론적 세계관을 타파하여 '오랑캐'[夷] 세계에 대하여 열려진 국제관을 확립하고, 대내적으로는 근대외교의 알맹이를 이루는 통상에 대처하여 '서기'(西器)의 도입에 의한 경제적 근대화를 도모하였던 세력이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종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해오던 일부 관료, 재야 사림층들에게서 "개화는 인정하되 물질적 측면에만 한정시키자"는 논의가 나왔는데, 이것이 동도서기론이며 이 주장을 펼치는 자들을 점진개화파라고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동도서기사상을 개화사상의 한 분파로 이해하는 경우, 개화사상을 개국 및 그 전후의 대외적 위기에 대응한 근대지향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으로 보면서, 동도서기사상이 그 한 흐름으로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던 사상이라고 파악한다.
셋째, 개화사상을 전후 발전단계로 나누고 그 가운데 전단계가 동도서기론이라고 보는 경우는 1882년 이전 단계에서의 개화사상을 중국의 '중체서용'이나 일본의 '화혼양재'와 그 사상적 성격이 같다고 본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은 부국강병책의 사상적 원동력으로 작용했지만 그 관심이 주로 서양무기와 서양문물에 집중되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운동의 폭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도서기론은 점차 '문명개화'로 그 폭을 넓혀가면서 체제개혁사상으로 발전해갔다. 이와 함께 동도서기론과 문명개화 활동의 현실적 목표도 같아졌다. 즉 이들은 독립의 구상을 부국강병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했던 체제개혁의 사상도 결국은 부국강병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개화파들이 의회민주제나 시민적 자유 등의 장점을 역설하면서도 조선사회 내부에 실제로 적용하려는 구체적 노력은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발전의 계기로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 일본의 문명개화론자들이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도 하고, 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 중인 출신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개화사상의 변모시기를 약간 달리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
즉 개화사상은 1870년대까지 동도서기론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러한 초기의 개화사상 가운데서 일본과의 접촉을 통해 양무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을 모델로 한 변법적 근대화 방략을 추구하는 세력이 형성된 것은 1880년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기존의 양무론을 고수하는 민씨척족 세력 및 온건개화파 등과 노선이 다른 세력이 나타났으며, 이 두 세력간의 갈등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실질적인 지배예속관계를 강요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갔다.
이와 같이 동도서기론을 개화사상의 전후 발전단계 가운데 전단계로 보는 경우는 대체로 초기개화사상의 의미를 축소시키고 발전의 원인에서도 외적계기를 중시한다. 그러나 초기개화사상 안에도 동도서기적 사상이 국가의 위기상황 앞에서 체제개혁의 상황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내적 발전의 논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대내외적 위기라는 시대배경하에서 형성된 동도서기사상은 개화사상과 함께 국내외의 위기를 부국강병과 근대화의 실현을 통한 국가독립의 확보를 통해 극복하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한국에서의 동도서기적 개화사상은 동도 위에 서양의 과학·군사 기술을 수용하려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독립의 확보에 있었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수행하는 노선과 수행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 문명개화론과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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