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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7(순조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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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6(고종 13) |
국적 | 조선, 한국 |
본관 | 반남(潘南,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
요약 개국통상론을 주장해 근대화를 주장한 조선 후기 개화 사상가. 본관은 반남, 자는 환경, 호는 환재로 할아버지는 박지원이며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청의 양무운동을 목격한 뒤 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때 김옥균·유길준 등에게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을 계발시켰다. 1875년 9월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도록 했다.
서법(西法)에 대한 동교(東敎)의 우월성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실학사상의 연장선상에서 개국통상론(開國通商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초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교량적 역할을 했다. 본관은 반남.자는 환경(桓卿)·환경(瓛卿), 호는 환재(桓齋)·환재(瓛齋)·환재거사(瓛齋居士).
할아버지는 지원(趾源)이고, 아버지는 현령 종채(宗采)이며, 어머니는 유영(柳詠)의 딸이다. 그는 15세부터 문명을 떨쳤으며, 20세 무렵 효명세자(孝明世子)와 교유하면서 〈주역〉을 강의하고 서로 국사를 의논했다.
1830년 세자의 급서(急逝)와 연이은 부모와의 사별로 칩거,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조부 박지원의 실학사상을 계승하면서, 윤종의(尹宗儀)·남병철·김영작(金永爵)·신석우(申錫愚)·신석희(申錫禧)·김상현(金尙鉉) 등 당대 학자들과 교유했다. 1848년(헌종 14) 중광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을 거쳐 병조정량·용강현령·부안현감·장령·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민정을 시찰했다. 1861년 제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중국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세력의 실체를 목격했고, 심병성(沈秉成)·왕증(王拯)·풍지기(馮志沂) 등 중국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목격·처리했다. 1864년 고종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 燕巖集〉·〈해국도지 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을 계발시켰다.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도록 했다. 1876년 1월 수원유수로 있다가 죽었다.
개국통상론
당시 서구열강의 침입에 대해 대원군을 위시한 척화론자들은 화이론적 관점에 입각하여 개항불가론을 주장했지만, 그는 서양문물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서구열강과의 교역을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서기(西器)를 배워 부국강병을 도모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개국통상론은 가학(家學)인 북학의 해외교류론과 2차례의 연행사절에서 체득한 국제정세 인식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이 시기를 서구열강이 서로 동맹을 맺고 약소국을 정벌하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파악하였으며 서양세력의 강력한 무력, 그리고 조선 내부의 민심의 이반과 국방의 허실을 인식하고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열강의 각축하는 현실 속에서 조선이 살아남는 길은 '기의'(機宜)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치에서는 정치기강의 확립과 폐정개혁의 추진, 민곤(民困)의 타파와 민심의 수습, 국방강화를 위한 무기정비 등을 때를 놓치지 않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농민항쟁 및 농민경제 파탄의 원인을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파악했으며, 민곤타파를 위한 경제개발이나 무기제조를 위한 기술도입의 문제를 북학파가 제기했던 해외교류론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 외교를 통해 실시되어야 할 사항으로 이해했다.
1861년 중국에 가기 이전에 이미 〈해국도지〉 등을 통해 미국이 예의를 숭상하는 부강국이며 국제분쟁을 잘 해결해주는 나라라고 인식, 미국과 결맹을 통해 열강의 침략을 견제하고 발전된 기술 및 필요한 물산을 도입·교역하여 조선을 부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즉 그의 개항통상론은 경제적으로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정치적으로 서구열강 특히 미국과 동맹을 맺어 열강의 세력균형과 부국강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1872년 2차 중국 방문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는 청나라 양무운동의 일정한 성과를 목격하고 개국통상론의 유효성을 확신했다. 귀국보고에서 청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의 화포·화륜선·양화 등을 도입해오다가 점차 그 기술을 습득하고 모방하여 자력으로 이를 제조해냄으로써 서양은 실리(失利)하고 있다고 지적, 개국통상론에 의한 부국강병책의 모델을 양무운동에서 찾았다.
이러한 기술도입 사상은 김옥균·박영효·김윤식·유길준 등 개화사상가들의 기술도입론으로 연결되었다.
한편 대원군정권하에서 실행될 수 없었던 개국통상론(대미개국론)은 1870년대 일본이 접근해오는 시대상황에 따라 대일개국론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일본의 서계(書啓) 문제에 대해서도 화이론적 관점이 아닌 개국통상론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즉 일본은 청나라와 평등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하고 있었기에 일본이 청나라에 보낸 국서에서도 '다이니혼테이고쿠[大日本帝國]', '덴노헤이카[天皇陛下]' 같은 문구가 항서(恒書)되고 있지만 외교적인 전례에 따라 이를 범상하게 넘기고 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문서를 내용상에서 검토해야 함을 역설하고 자극적인 문구에 구애되는 소아적 우(愚)를 과감히 버리고 선진적인 대국적 입장을 취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개국통상론은 첫째, 개국통상은 세계사적 조류이며 그것이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는 유효한 방책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서양과 청과의 관계도 조공이 아니라 통상으로서 평등한 관계라는 것, 둘째, 서양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서양기술의 습득·이용이 필요하다는 것, 셋째, 서양기술의 습득은 그 기교에 현혹되지 말고 이(利)를 취해야 한다는 것 등으로, 이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라는 초기 개화사상으로 전개되어갔다.
저서로 〈환재집〉·〈환재수계 瓛齋繡啓〉 등이 있고, 편저로 〈거가잡복고 居家雜服考〉가 있다. 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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