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미상 |
---|---|
사망 | 1881(고종 18) |
국적 | 한말, 한국 |
요약
동래 범아사의 승려로, 일찍이 초기 개화사상가인 유홍기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1879년 김옥균·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위해 밀항을 모색했다. 교토에서 10개월간 체류하면서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펴보았다. 1880년 8월, 김홍집과 친교를 맺어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을 알게 되었다. 민영익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고종에게 상주해 총애를 얻었다.
고종의 밀명을 받고 1880년 10월 원산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뒤 청나라 공사 하여장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체결의 알선을 부탁했다.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임명되어 미국과의 조약체결에 대비한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고, 신사유람단과 신문화 습득을 위한 젊은 유학생들의 일본 파견을 추진했다.
동래 범어사의 승려로, 일찍이 초기 개화사상가인 유홍기(劉鴻基)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9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해 밀항을 모색했다. 그해 6월초 일본 혼간 사[本願寺]의 부산 별원에 와 있던 승려 오쿠무라[奧村圓心]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京都]의 혼간 사에 체류하며 일본어와 그곳 생활을 익히면서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펴보고, 서울에 있는 김옥균·박영효 등에게 서구문명을 소개한 서적 등을 보내면서 계속 연락을 취했다. 교토에서 10개월간 머무른 뒤 1880년 4월 도쿄[東京]로 가 혼간 사 승려들의 알선으로 일본의 조야정치가들과 접촉했다. 그해 8월 수신사로 온 김홍집(金弘集)과 친교를 맺어 김홍집과 함께 9월말 귀국했다. 귀국 후 김홍집의 소개로 민씨정권의 핵심인물인 민영익을 알게 되어 그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면서, 민영익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나보고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상주(上奏)해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때 고종은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쥰센[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에 따라 미국과 조약을 맺기를 원했다.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1880년 10월 원산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도착한 뒤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체결의 알선을 부탁했다. 그뒤 1개월간 도쿄에 체류하면서 일본 지도자들과 접촉한 뒤 그해 12월 18일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개항 이후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으로 임명되어 미국과의 조약체결에 대비한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것은 1881년 1월 김윤식(金允植)이 중국에 가서 이홍장과 조약 내용을 검토할 때 제출되었다. 미국과의 조약을 준비하면서도 그는 외교정책면에서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소극적인 불간섭주의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관하지 않을 영국과의 친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 특히 신문화 습득을 위해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 등 젊은 유학생들의 일본 파견을 강력히 추진했다. 정부기구 개편과 함께 군비강화를 위해 별기군의 설치가 추진되고 무기와 군함을 구입하기로 결정이 내려지자, 이원회(李元會)와 함께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던 도중 그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던 대원군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보기도 하나, 온건개화 노선을 걷고 있으면서 이동인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김홍집·이조연(李祖淵)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