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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다른 표기 언어 獨立協會

요약 1896년 설립된 사회정치단체.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던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들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 당시 독립협회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청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청의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고쳤다.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어 국민 계몽 운동도 전개했는데, 토론회의 주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또한 종로광장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어 자주 국권과 민권 등을 요구하는 민의를 담은 내용을 정부에 주장했다. 이후 독립협회는 개혁 내각을 수립하고 의회 개설도 추진했으나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1898년 12월 해산했다.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모습

ⓒ 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에 걸쳐 자본주의 열강의 주권침탈과 지배층의 중세적 인권유린이 계속 자행되는 가운데 주권독립운동·민권운동·개화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창립과 발전과정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여 서구 시민사회를 체득하고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한 반역죄가 사면되고 개화정부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 1895년 12월 하순에 돌아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1896. 4. 7), 독립협회를 창립했다(1896. 7. 2). 강령은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자주독립이었다.

독립협회 활동은 대체로 4시기로 구분되며, 각 시기마다 운동의 목표와 주도세력에 차이가 있었다.

서재필(徐載弼)

독립협회의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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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창립~1897. 8. 28)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공원·독립문·독립관 건립 등을 목표로 서재필의 주도 아래 활동하던 창립시기이다.

창립 주도세력은 첫째, 갑오개혁 당시의 집권관료 세력들로 서재필을 귀국시켜 〈독립신문〉의 창간을 지원해준 건양협회(建陽協會) 세력, 둘째, 외국 외교관이나 선교사들과 교제를 가진 외교계 관료세력으로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이완용(李完用)·서재필 등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 셋째, 개별적으로 서구근대사상에 접하면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중견실무관료층 등이었다. 독립협회는 고문 서재필, 회장 안경수(安駉壽), 위원장 이완용 외 김가진(金嘉鎭)·이상재 등 8명의 위원과 송헌빈(宋憲斌)·남궁억(南宮檍)·오세창(吳世昌) 등 10명의 간사원으로 구성되었다.

회원자격은 독립문건립 보조금을 내고 가입에 찬성한 자였다. 이 사업은 시민계층과 왕실의 호응을 받았으며, 회원은 2,000여 명에 달하였다. 이 당시 독립협회에는 관료층이 대거 가담하는 등 각계파가 혼재되어 있었으며, 일반시민계층보다는 고급관료들이 주도하는 사교모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2기(1897. 8. 29~1898. 2. 20)

서재필과 윤치호의 주도 아래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여 일반민중을 계몽하던 시기이다.

토론회의 주내용은 국민계몽을 위한 주제뿐 아니라 당시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집권 관료층이 이탈해간 반면, 신지식인 계층이 점차 전면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협성회(協成會 : 배재학당)와 광무협회(光武協會 : 京城學堂 學員 등) 학생전위대를 통하여 대중동원체제를 확보하는 등 정치운동준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임원진은 회장 안경수, 부회장 이완용, 서기 정교(鄭喬), 회계 권재형(權在衡)·이근영(李根永) 등이었다.

윤치호(尹致昊)

조선, 대한제국의 민권운동가.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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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1898. 2. 21~9. 10)

구국선언상소(救國宣言上疏)를 기점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민의를 국가정책에 반영하도록 한 시기이다.

주내용은 이권침탈과 내정간섭 반대 등 자주국권운동과 전근대적인 압제와 수탈로부터 신체와 재산권의 자유획득을 위한 민권운동·의회설립운동 등이었다. 관료층이 대거 퇴진하고 임원진이 대폭 교체되었다. 회장 이완용, 부회장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윤효정(尹孝定), 제의(提議) 정교·양홍묵(梁弘默)·이건호(李建鎬), 사법위원 안영수(安寧洙)·강화석(姜華錫)·홍긍섭(洪肯燮) 등이었다.

3월 11일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전직하게 되자 윤치호가 회장대리로 선출되었다. 5월 14일 서재필이 출국당하고, 7월 17일 이완용이 외국에 대한 이권양여문제로 제명처분되었다. 이때의 운동은 정부와 대립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 속에서 사업을 추진하였다. 지회설립요구에 따라 공주·평양 지회를 인가하였으며, 박문협회(博文協會 : 인천)·찬양회(贊襄會 : 부인단체)·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 : 시전상인) 등의 자매단체가 등장하였다.

반대세력인 황국협회(皇國協會)도 등장하였다.

제4기(1898. 9. 11~12. 25)

독립협회의 공식기구보다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관민공동회를 주관하여 개혁내각의 수립과 의회개설이 가능하게 된 시기였으나 정부의 기습공격을 받아 해산된 시기이다.

임원진은 회장 윤치호, 부회장 이상재, 서기 박치훈·한만용(韓晩容), 회계 이일상, 사법위원 남궁억·정교, 평의원 20명이었으며, 회원은 4,000여 명에 달하였다. 인구 3,000명 이상인 중소도시에 학식과 재산이 있는 자가 청원할 때 설립을 인가한다는 지회인가조례(支會認可條例) 및 지회세칙(支會細則)을 만들어 각지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이 지회는 이후 지방 계몽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이밖에 자매단체로 보신사(保信社 : 소상인 금융업자)·취영회(聚英會 : 배재학당) 등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사상과 활동

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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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활동은 주권독립운동·자유민권운동·자강개혁운동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주권독립운동은 첫째,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견지하며 대내적으로는 황권의 확립과 강화를 포함하는 군주주권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한 정치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회보〉를 통하여 독립의 의미와 필요성, 나아가 독립국민으로서의 자세를 계몽하는 한편, 독립문·독립회관·독립공원 등을 만들어 대중들의 독립의식을 높여나갔다. 이는 몇백 년 지속된 종래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과 사대주의적 질서관에 기초한 청나라로부터의 속국적인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하여 국가체제와 국민의식을 독립국의 체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또한 국가체제를 황제국으로 바꿈으로써 독립국의 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정부에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요구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여론과도 부합되는 것으로서 정부가 이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된 것이다. 둘째, 이권양여(利權讓與) 반대운동이다. 청일전쟁 이후 자본주의 열강의 한반도 침략은 종래의 상품판매단계를 넘어 철도부설권·광산채굴권·산림벌채권 및 조차지(措借地)·군사기지 확보 등의 이권쟁탈을 하면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絶影島) 석탄고기지조차요구 저지,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기지 회수, 한러은행 철거, 러시아의 목포(木浦)와 증남포(甑南浦) 조계(租界) 매수 저지, 프랑스의 광산이권요구 반대, 독일의 금광이권요구 반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자유민권운동은 인권확대운동과 참정권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인권운동은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을 근거로 한 국민의 생명 및 재산권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운동으로서 오랜 전제군주제 및 양반관료의 무제한적인 수탈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려는 운동이었다. 서구시민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 운동은 '백성마다 얼마만큼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도 뺏지 못할 권리'라 하였다.

양반노비제도, 관존민비와 남존여비 등 차별적인 신분제도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철폐하고자 하였다. 또한 백성의 재물은 법률 외에는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구체적으로 독립협회 회원에 대한 정부의 구속 및 재산몰수에 대하여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할 수 없다고 강력히 항거하여 효과를 거두었으며, 갑오개혁 때 폐지한 참형(斬刑) 제도와 연좌법(連坐法)을 부활하려 했을 때 강력한 반대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시켰다.

참정권운동의 구체적인 모습은 의회개설운동으로 나타났다. 독립협회가 정부에 제출한 의회설립안은 일종의 상원설치안으로, 갑오개혁 때 내각의 자문과 법률의 심의제정기관으로 만들었으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중추원을 강화하여 의회의 구실을 하게 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의원이라는 것은 백성에게 정권을 주는 것이다…… 무식하면 한 사람이 다스리나 여러 사람이 다스리나 국정이 그르기는 마찬가지요, 무식한 세계에는 군주국이 도리어 민주국보다 견고함은 고금 사기와 구미 각국 정형을 보아도 알지라"라며 하원설치는 반대하였다.

중추원관을 50명으로 하되 절반은 관선(官選), 절반은 민선으로 하며 민선의원은 모두 독립협회 회원으로 충당할 것을 주장했다.

자강을 위한 경제개혁운동은 전통적인 농업편중의 경제체제를 개편하여 상공업 주도의 자본주의적인 산업경제체제로 전환시키려하였다. 공장제공업의 육성, 자유로운 무역과 국내상업, 광산 등 각종 산업개발, 기술교육, 은행설립 등을 장려하였다. 특히 선진 기계기술과 방적사를 도입하여 방직공업을 주도산업으로 한 산업혁명을 수행하려고 하였으며, 소요자본은 민간자본을 주로 하고 정부의 재정자금을 부차적으로 하여 충당하려 하였다.

여기서 민간자본은 지주자본이었다. 이들은 지주제를 재편·강화하는 동시에 미곡수출을 확대하거나, 농지개발, 서구농업기술의 적극적 수용, 상품작물의 재배 등을 통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킴으로써 지주들의 자본축적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수입품을 국내에서 제조·생산함으로써 상업을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는 등 소상품생산자의 성장과 보호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기업·대상인 중심의 경제체제를 지향하였다.

이렇게 볼 때 독립협회운동은 대외에 자주적인 군주주권국가를 지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는 미국·영국·일본으로 연결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반(反)러시아적 입장을 견지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 민권운동에서는 중세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였으며, 경제개혁운동에서는 지주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독립협회운동은 이후 계몽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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