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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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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리우스주의 때문에 동방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성자가 성부와 완전히 동등함을 나타내기 위해 성서에 없는 단어 '호무시오스'를 니케아 신경에 포함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를 추방했는데, 이는 교회와 국가의 공고한 유대와 교회의 일에 세속의 후원이 중요함을 뚜렷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교회법을 반포했는데, 그 중에는 주교 서품 절차, 성직자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정죄, 주교와 사제·부제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 등이 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이 각기 자기 지역에서 자신들의 관구가 다른 주교 관구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이콘, (17세기,모스크바)

ⓒ Симон Ушаков/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초심자였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여 개회식을 주재하였으며 논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가 처음 내세운 이단교리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라 피조된 인간'임을 강조했음) 때문에 동방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이 공의회에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이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는 대신 특사를 보냈다.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일부 참석자들의 망설임이 있었으나 성자가 성부와 완전히 동등함을 나타내기 위해 성서에 없는 단어 '호무시오스'('본질상 같은'의 뜻)를 니케아 신경에 포함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를 추방하였는데, 이는 교회와 국가의 공고한 유대와 교회의 일에 세속의 후원이 중요함을 뚜렷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또한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교회법을 반포했는데, 그 가운데는 주교 서품 절차, 성직자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정죄, 주교와 사제·부제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 등이 있다. 5세기 비잔티움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에 따르면 이 공의회에서 성직자의 독신을 규정하는 교회법을 만들려 했으나 일부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이 각기 자기 지역에서 자신들의 관구가 다른 주교 관구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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