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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국의 정치인.
정식 이름은 David William Donald Cameron.
영국 보수당 당수로 2010년 영국 총리에 당선되었다.
캐머런은 윌러엄 4세의 후손으로 부유한 귀족 출신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튼 고등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의 브레이즈노즈 칼리지를 다녔으며 1988년 철학 및 정치학, 경제학 최우수 등급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보수당 연구 팀에 들어갔다. 1992년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의 특별 보좌관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내무장관 마이클 하워드의 특별 보좌관직을 맡게 되었다. 1994년에는 홍보 회사인 칼튼 커뮤니케이션스에 들어가 법인 업무 담당 임원으로 재직했다. 칼튼 커뮤니케이션스에서 일하다 2001년 런던 북부 위트니 선거구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했다.
캐머런은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중도 성향으로 인해 빠르게 보수당의 신세대 주역으로 주목을 받았다.
캐머런은 그보다 18년 먼저 의회에 입문하여 비슷한 명성을 얻은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와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하원의원으로 2년을 지낸 직후 캐머런은 하원 의사당에서 보수당 대변인을 맡으며 보수당 요직에 임명되었다. 2004년 보수당 당수였던 하워드가 자신의 젊은 피후견인이었던 캐머런을 정책조정 수장 자리에 앉혔다. 그 후 캐머런은 2005년 선거를 위한 보수당의 성명서를 준비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당은 선거에서 참패했고 하워드는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2005년 10월 개최된 당 연례회의에서 보여준 자신감 있는 연설로 캐머런은 자신에 대한 평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이후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캐머런은 당의 현대화를 모색하고 우익 편향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했으며, 차기 보수당 정부는 세금 감면보다 경제 안정과 강력한 공공 서비스를 우선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캐머런의 지휘 아래 당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2006년 지방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것은 보수당이 거의 15년 만에 보여준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2007년 블레어의 뒤를 이어 영국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가 된 고든 브라운에게 조기 선거를 실시하라고 부추긴 영국 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뒤처졌다. 노동당이 9월 전당대회를 개최할 무렵에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보다 2배 정도 앞섰다. 그러나 10월 초에 열린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캐머런은 연설문도 없이 1시간 이상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개혁 조약 협상을 위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개최될 유럽 연합(EU) 정상회담과 관련하여 캐머런은 유럽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던 총리의 공약과 반대로 브라운이 국민투표를 통한 합의를 배제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다른 쟁점 외에도 캐머런은 노동당의 범죄에 대한 정책과 국민건강보험에 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여론조사에서 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머런은 연설을 통해 총리에게 선거를 실시할 것을 대담하게 요구했다.
연설은 찬사를 받았고, 그에 대한 결과로 브라운 총리는 2009년 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브라운이 리스본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27개 회원국들이 세부적인 조약 결의문에 합의한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캐머런은 "브라운에게 국민투표 없이 서명을 할 수 있는 절대 민주주의 권한은 없다."라고 주장하며 전에 했던 비판을 재개했다. 12월이 되자 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을 13% 차이로 확실하게 앞질러, 1989년 이후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2008년에 닥친 세계 경제 위기로 인해 캐머런은 보수당에서 위치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비록 영국 밖에서는 위기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 브라운이 찬사를 받았지만, 2008년 노동당 각료들이 내부 반란을 일으키면서 1997년에 경제 호황과 불황이 반복하는 시기는 끝났다고 얘기했던 브라운의 공약은 캐머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9년 3월 캐머런은 유럽 의회의 보수적인 당들의 주류 연합인 유럽 시민당에서 영국 보수당은 빠지겠다는 공약을 이행했다. 2009년 6월 보수당은 유럽 의회 선거에서 득표수 1위를 차지했으며, 캐머런은 유럽 보수 성향 당과 개혁 성향 당 모임의 회원 자격으로 영국 보수당이 유럽 의회에 들어가도록 했다.
2007년 이후 소문이 나돌던 의회 비용에 대한 추문이 2009년 5월에 〈데일리 텔레그래프 Daily Telegraph〉에 보도되면서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추문이 정당의 정책 노선에 영향을 미치는 동안 노동당은 대중의 비판 공격을 정면으로 맞았고 캐머런은 대중은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비록 투표 수는 2009년초 최고였다가 하락세를 보였지만 캐머런과 보수당은 2010년 5월 6일에 열린 총선거에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유권자들은 1931년 이후 가장 많은 의석을 보수당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총 의석 수는 여전히 완전한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유 민주당 당수인 닉 클레그의 호감을 얻으려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협상 대표들로 인해 선거 뒤에 정치적인 논쟁의 시기가 나타났다. 자유당과 노동당 제휴파 연합의 가능성이 결실을 맺지 못한 이후인 5월 11일에 브라운은 총리직을 사퇴했고 캐머런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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