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대한민국의 전기통신

다른 표기 언어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도입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1894년 한성전보총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전화시험을 거쳐 1896년 10월에 개통된 궁내부 행정전화가 그 효시가 된다.

일반공중용 전화는 서울-인천 간의 시외전화가 1902년 개통되면서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서울에서 시내전화 교환업무도 개시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약 6개월 전 한일통신협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통신주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기통신사업은 일본의 식민지통치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주로 일반대중의 통제와 식민지 수탈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1941년의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한반도 대부분의 통신시설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되었다.

그 결과 일반대중을 위한 통신설비의 확충은 이 1937~41년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체신부가 발족되어 전기통신설비의 재건이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으나 재원의 부족으로 만족할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52년에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해 통신분야의 국제협력활동이 시작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전국의 전화교환설비 등의 약 80%가 파괴됨으로써 전기통신설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1957년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965년에 텔렉스 자동교환망이 설치되어 수출입국을 지향하는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한 효과적인 지원수단이 갖추어졌으며, 1967년에는 마이크로웨이브 전국통신망이 개통되어 대용량통신과 텔레비전 전송중계가 가능해졌다.

1970년에는 위성지구국이 구축됨으로써 전세계와의 대용량통신이 가능해졌으며 1971년에는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가 개통되어 전국이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되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1970년대에는 급증하는 전기통신의 수요에 대처해 전기통신분야에 대한 설비확장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수요의 증가속도가 공급의 증가속도를 대폭 상회함으로써 1980년대 초에는 극심한 전화적체 현상이 생겼다.

1980년대에는 이와 같은 전화적체 문제를 해소하고 전자 및 통신분야를 새로운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전기통신부문 전반에 걸친 운영체계의 개편과 법령체계의 정비가 추진되었다.

이것의 일환으로 1981년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 제정되어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종전에 체신부가 담당하던 전기통신사업의 운영을 전담하고 체신부는 전기통신사업의 감독과 정책수립만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1982년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컴퓨터 통신과 같은 데이타 통신 서비스가 시작되었으며, 198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차량전화 서비스, 무선호출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83년에는 체신부의 정책기능을 강화하고 체계적인 통신발전을 유도할 수 있도록 1961년에 제정된 '전기통신법'을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분리·개편했다.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노력에 힘입어 전화회선설비는 1987년에는 1,000만 회선이 달성되는데 이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세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전화적체해소가 완전히 이루어졌고 전화를 신청하면 24시간 이내에 가설해주는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1987년 전국자동교환망이 완성되어 전국 어디서나 교환수를 거치지 않고 전화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첨단기술분야인 전기통신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는 관련기술의 개발, 축적과 기술기반 구축에도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전전자교환기의 국내개발이라는 야심적인 계획을 1982년부터 추진해 1984년 TDX-1A형 전전자교환기의 개발에 성공했다.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개발·제작된 TDX-1A형 전전자교환기는 1986년부터 전국 전화교환국에 설치·운영되고 있다.

1989년에는 용량이 증가된 TDX-1B형이 개발·보급되었으며, 뒤이어 1991년에는 10만 회선 용량급의 TDX-10형의 교환기가 개발되었다.

1990년에 들어서 전기통신분야는 양적으로 전화회선보유기준으로 볼 때 세계 제9위이며, 기술측면에서는 전전자교환기의 자체개발능력을 갖추게 되어 명실공히 통신선진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94년에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정보통신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집중육성하기 위하여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했다.

정보통신부의 발족으로 여러 부처에서 관장하던 정보통신 관련 업무가 한 부처로 일원화됨으로써 정보통신부는 수요측면의 정보화촉진정책과 공급측면의 정보통신산업육성정책을 상호연계하여 정보통신분야의 정책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통신부는 '선(先) 국내경쟁, 후(後) 국제경쟁' 원칙에 따라 정보통신시장에 과감히 경쟁을 도입한 결과 1999년 4월에는 하나로통신이 시내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어 정보통신 모든 분야에 걸쳐 경쟁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한편 1994년 정부조직 개편으로 정보통신부가 소프트웨어(S/W) 산업육성 업무를 관장하게 됨에 따라 정보통신부는 1995년 S/W개발촉진법을 개정하여 S/W시스템 개발, 유통환경 촉진, 전문인력양성 등 S/W진흥시책을 강구하고, S/W산업에 대한 적정한 대가기준을 정하여 S/W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또한 1997년에는 지역S/W지원센터를 설립하여 S/W산업의 저변을 확대했고, 1998년에는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해외 S/W지원센타를 설립하여 S/W산업의 해외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S/W관련 각종 지원기관을 S/W진흥원을 설립·통폐합함으로써 S/W산업에 대한 효율적이고 종합적인 지원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99년에는 서울 S/W타운 조성과 정보통신(IP)산업 활성화 대책 등을 중점 정책사업으로 추진하여 S/W산업의 세계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보통신기술개발에 대한 산(産)·학(學)·연(硏)의 공동연구개발과 정부의 집중적인 기술개발지원의 결과 세계 최초로 부호분할방식(CDMA)에 의한 이동전화기술을 상용화하는 등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나감으로써 정보통신 산업이 우리 경제에 있어 주력산업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1998년에는 305억 달러 수출 실적에 124억 달러 흑자를 구현함으로써 1997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극복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실업해소와 고용창출 문제가 우리 경제의 중심과제로 부상함에 정보통신전문투자조합 결성 등을 통한 IP산업 등 정보통신전문기업의 창업과 중소기업 위주의 기술개발 지원 등에 집중함으로써 정보통신분야의 지속적 성장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통한 고용창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현재 정보통신산업은 정부의 공정한 경쟁체제확립, 기술개발, 전문인력양성 및 S/W·벤처 기업 활성화를 통해 21세기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핵심전략산업으로 확고히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전기통신공사 심벌마크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한국

한국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대한민국의 전기통신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