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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로마 교황을 반대하고, 교황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여 어느 정도 물리적으로 성공한 사람.
대립교황 선출은 여러 번 있었지만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기록들 때문에 그 경위가 매우 불분명하며, 때로는 당대 사람들조차 누가 참 교황인지를 판단할 수 없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정확한 대립교황 명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상 대립교황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여 생겨났다.
① 교리상의 불일치:3세기에 단일신론(Monarchianism:삼위일체론에 관한 이단설)이 퍼지자 로마 사제 히폴리토는 교황 갈리스토 1세를 폐위하고 자기가 교황이 되려고 했다. 후에 히폴리토는 막시미누스의 박해 때 교황 폰시아노와 화해하고 순교했다(235).
② 교황 국외 추방:아리우스파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교황 리베리오가 정통신앙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추방하고(355) 대부제 펠릭스를 교황 펠릭스 2세로 앉혔으나, 결국 리베리오가 돌아와 다시 교황이 되고, 펠릭스는 죽을 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③ 세속 권력의 개입에 의한 이중선출:418년 대부제 율라리우스는 그를 편애하는 성직자 파벌에 의해 교황에 선출되고 황제의 총독과 비잔틴 황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다른 성직자들은 사제 보니파시오 1세를 교황에 선출했고, 황제는 결국 그를 공식 승인했다.
④ 이중선출과 그에 따른 제3자 선출:7세기에 파스칼리스와 테오도루스는 교황권을 놓고 경쟁했는데 두 사람 모두 단념하지 않았다. 마침내 온건 세력은 세르지오 1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이와 조금 비슷한 예로, 14세기에 교황청의 공식 소재지를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긴 일로 1378년에 서방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어 그 결과 로마 교황권, 아비뇽 교황권(대립교황들로 간주됨), 그리고 피사 공의회가 세운 제3의 교황권이 생겼으나, 결국 1417년 11월 11일 마르티노 5세가 교황에 선출됨으로써 통합되었다(→ 아비뇽 교황청, 서방교회 분열).
⑤ 교황선출 방법의 변화: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는 새로운 교황선거 절차를 공포하여 독일 황제들이 당시까지 교황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관행에 쐐기를 박았고, 로마 귀족들의 영향력도 제한했다. 이 결과 적법하게 교황에 선출된 알렉산데르 2세에 맞서 대립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선출되었으나 황제는 결국 알렉산데르 2세를 승인했다.→ 교황제
히폴리토(217,218~235) |
노바티아누스(251) |
펠릭스(2세)(335~358) |
우르시누스(366~367) |
율라리우스(418~419) |
라우렌티우스(498,501~505/507경) |
디오스코루스(530) |
테오도루스(687) |
파스칼리스(687) |
콘스탄티누스(2세)(767~768) |
필리푸스(768) |
요한네스(844) |
아나스타시우스(855) |
크리스토포루스(903~904) |
보니파키우스 7세(974,984~985) |
요한네스 16세(또는 17세)(997~998) |
그레고리우스(6세)(1012) |
베네딕투스 10세(1058~59) |
호노리우스(2세)(1061~72) |
클레멘스(3세)(1080~1100) |
테오도리쿠스(1100~02) |
알베르투스(1102) |
실베스테르(4세)(1105~11) |
그레고리우스(8세)(1118~21) |
켈레스티누스(2세)(1124) |
아나클레투스(2세)(1130~38) |
빅토리우스(4세)(1138) |
빅토리우스(4세)(1159~64) |
파스칼리스(3세)(1164~68) |
칼리스투스(3세)(1168~78) |
인노켄티우스(3세)(1179~80) |
니콜라오(5세)(1328~30) |
클레멘스(7세)(1378~94) |
베네딕투스(13세)(1394~1423) |
알렉산데르(5세)(1409~10) |
요한네스(23세)(1410~15) |
클레멘스(8세)(1423~29) |
펠릭스(5세)(1439~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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