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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93.5㎝. 대체로 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머리에 삼산관을 썼고 얼굴을 앞으로 숙였으며 상체에는 2줄 목걸이만 걸쳤고, 허리에 얇은 옷을 걸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른쪽 무릎이 솟아오른 부분에는 옷 주름이 생략되어 전체에 생동감을 주며 미묘한 근육이 묘사되어 사실감이 돋보인다. 중국 북주·북제시대 반가사유상 형식이나 더욱 단순화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더 발달된 단계로 보인다. 일본 고류사의 목조반가사유상과 유사하여 이 상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에서는 미래에 부처가 될 미륵보살과 사회의 청년지도자였던 화랑과의 특수한 연관 속에서 반가사유형의 보살상이 신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93.5㎝. 이 상은 경주 오릉(五陵) 부근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머리에는 3면이 둥근 산 모양을 한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다. 앞으로 숙인 둥근 얼굴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밝은 미소를 띠고 있어 소년과 같은 신선함이 느껴진다.
목에는 가는 음각선의 삼도(三道)가 있고 상체에는 2줄로 도드라진 목걸이 이외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데, 팔과 몸체는 비만하지 않으면서도 미묘하게 근육이 묘사되어 사실감이 돋보인다. 허리에 걸친 상의는 매우 얇아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며 특히 반가한 오른쪽 무릎이 힘있게 솟아오른 부분에는 옷주름이 생략되어 상 전체에 강한 생동감을 준다.
대좌를 덮어내린 상의의 옷자락은 2단의 주름을 형성했는데 조각이 깊고 사실적이다. 그밖에 몸 옆으로 내려온 허리띠나 둥근 옥장식, 둥근 대좌의 표현이 모두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완성미를 보여준다. 국보 반가사유상이 예리하면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조형미를 보여준다면 이 상은 간소하고 자연스러운 조형미를 통하여 생동감을 준다.
이러한 표현은 기본적으로 중국 북주·북제시대 반가사유상의 형식이나 조각양식을 반영하면서도 더욱 단순화되고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조각적으로 더 발달된 단계로 보인다. 같은 유형의 국내 반가사유상으로는 평양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이나 경주 단석산마애반가사유상이 있으며 제작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2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1966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석조반가사유상의 하반신(경북대학교 소장)이 발견된 후 두 상의 형태나 옷주름처리에서 유사성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일본 교토[京都] 고류 사[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모습이 매우 비슷하여 오랫동안 주목받아 왔는데 이 고류 사의 창시자인 진하승(秦何勝)이 신라와 문화적인 교류가 있었다든가 혹은 신라에서 전해진 상이 절에 모셔졌다든지 하는 일본의 기록이 있어 이 상이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크게 해준다. 특히 고류 사의 상은 메이지[明治] 시대에 보수되었는데 그 이전의 머리모습을 보면 국보 반가사유상이나 황룡사지 출토 금동보살 머리 등 한국의 상들과 얼굴인상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밖에도 반가사유형의 보살상은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된 미륵신앙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신라에서는 미래에 부처가 될 미륵보살과 사회의 청년지도자였던 화랑과의 특수한 연관 속에서 신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연대는 대체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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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1962.12.20 지정)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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