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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융 오디세

그린스펀 교향곡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잘못된 신념이 가져온 엄청난 비극

제1악장 기쁨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훈장은 의회가 수여하는 황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과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이다. 자유메달은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나 로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같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존 스타인벡, 월트 디즈니와 같은 예술인에게도 수여되며, 테레사 수녀,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과 같은 외국인에게도 수여된다. 심지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같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추서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웬만한 공을 세우지 않고는 받기 어려운, 대단히 영예로운 상이다.

그런데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5년에 이 상을 세 사람에게 동시에 수여했다. 영국 역사학자 로버트 콩퀘스트(Robert Conquest), 50년 관록을 자랑하는 미국의 흑인 여가수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그리고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었다. 학자, 연예인, 공직자가 적절히 배합된,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이 세 사람의 수상자 사이에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젊은 시절 줄리어드 음대에 다니면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가수 프랭클린과는 음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역사학자 콩퀘스트와는 자유라는 공통점이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린스펀은 규제철폐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즉 경제적 자유의 선봉에 서 있다. 콩퀘스트는 1930년대 스탈린이 자행한 숙청의 잔인함을 고발하면서 정치적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1968년 발표된 콩퀘스트의 책 『거대한 공포(The Great Terror)』는 소련의 인권에 관한 세계인의 관심을 촉발했고, 이는 다시 이 년 뒤인 1970년 소련 사회를 고발한 솔제니친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린스펀이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자유메달을 받은 날은 2005년 11월 9일이다. 그날은 전 세계 모든 유대인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날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 전 독일에서 있던 비극적 사건 때문이다.

자유메달을 수상받는 앨런 그린스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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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악장 노여움

제1주제 고난

1932년 7월 치러진 독일의 총선에서 나치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자 1933년 1월 히틀러가 새로운 연립내각을 구성한 뒤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가 취임한 후 행한 첫 번째 조치는 나치 친위대가 연방 의회 건물을 에워싸도록 하여 야당 의원의 진입을 원천봉쇄한 뒤 소위 ‘전권위임법(Ermächtigungsgesetz)’이라는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단 5개조로 구성된 이 법은 실로 놀랍다. 즉, 제1조 “헌법상 입법부가 가지는 입법 권한과 예산 편성 권한을 행정부도 동등하게 갖는다”와 제2조 “행정부가 만든 법률이 헌법과 상충할 때는 법률이 우선한다”를 통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히틀러를 헌법 위에 군림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반발이 심했다. 전권위임법이 통과된 직후인 1933년 2월 27일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일어나 연방 의회 건물이 홀랑 타버렸다(Feuer im Reichstag.) 그러자 히틀러는 연방의회당 화재 사고의 배후에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있다고 선언하고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업에 돌입했다.

1933년의 독일 연방의사당 화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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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인종차별까지 동원했다. 당시 독일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는 유대인이 독일의 상권과 국부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국민 대부분이 이런 현실에 불만이 많았는데, 히틀러는 이 점을 이용해서 반유대인 정책을 본격화한 것이다. 나치 정부는 전국적인 유대인 상점 배척 운동(national boycott)을 벌이는 한편, “위대한 아리안족만의 순수 혈통 사회 건설”을 내세우면서 공무담임법(Berufsbeamtengesetz, 1933년 4월)을 제정했다. 유대인의 고위직 공무원 임용 및 대학 입학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1935년 9월에는 이른바 ‘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법을 통해 유대인을 더욱 옥죄었다. 즉, ‘독일인 혈통 보존법’을 통해 아리안족과 여타 민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가 하면, ‘제국시민권법’을 통해 유대인의 시민권을 더욱 강하게 제한했다. 이런 법들을 통해 독일 국민은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으로 구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피폐상에서 벗어나서 다시 강대국에 올랐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치른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유대인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이 무렵 유대계 십 대 소년 헤르만(Hermann)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뉘른베르크 법이 발효되던 때 그는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열네 살이었다. 폴란드에서 양복점을 경영하던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독일로 이주해왔건만, 때마침 제정된 법률 때문에 독일에서는 아무런 장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가족은 프랑스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독일이 폴란드계 유대인의 재산을 동결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한 푼도 가져올 수 없었고, 프랑스는 무일푼의 헤르만 가족을 따뜻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일개 난민에 불과한 이들은 직업을 얻을 수도 없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추방 명령을 받았다.

고민 끝에 헤르만의 부모는 아들만이라도 영국 정부가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보내려고 했다. 이것도 실패했다. 복잡한 국제 정세 때문에 미성년자인 헤르만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것을 영국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모의 고향인 폴란드로 갈 수도 없었다. 폴란드에서는 오 년 이상 외국에 머무른 유대인의 시민권과 재산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남는 것은 독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게슈타포의 사냥감이 되어 집단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모든 상황이 꿈 많은 십 대 소년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다. 자신의 미래를 놓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를 보내는 헤르만은 나치당의 처사에 분노했다. 추방 명령을 받고 프랑스 파리를 떠나야 하는 날이 가까워오자, 세계 만방을 향해 독일 정부의 부당함을 알리기로 했다. 허름한 총기류 가게에 들러 권총 한 자루와 총알 몇 개를 샀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짧은 편지를 썼다. 자기가 앞으로 행할 일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요, 1만 2천명에 달하는 똑같은 처지의 유대인을 대변하는 의로운 행동이라는 신념을 밝혔다.

제2주제 맥주홀 폭동

헤르만이 권총을 들고 달려간 곳은 파리에 있는 독일 대사관이었으며, 시간은 1939년 11월 8일 아침이었다. 이 날은 히틀러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쿠데타를 시도했다. 국내적으로는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해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도 제1차 세계대전 유발의 책임 때문에 발언권을 잃은 채 빈사 상태에 놓여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뒤집으려 한 것이다. 승전국들의 이해타산에 의해 세워져 태생적인 한계가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독일인의 힘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독일 국민의 자부심을 회복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복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거사를 벌이기로 한 날은 1923년 11월 8일이었다.

히틀러는 어차피 국민들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바이마르 공화국 전복이 아주 쉬울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훗날 ‘맥주홀 폭동(Hitler Putsch, Beer Hall Putsch)’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계획과 모래알 같은 결속력으로 인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 실패로 끝나버린 우스운 해프닝이었다. 시민들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히틀러를 포함한 가담자들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쿠데타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역설적인 일이 벌어졌다. 재판에 관한 신문기사를 통해 아리안 족의 위대함을 일깨우고 부국강병을 촉구하는 나치당의 정강이 일반 대중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나치당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일반 대중은 원내에 진출하지도 못한 이 신생 꼬마 정당에서 신선함을 느꼈다. 히틀러는 재판을 받는 동안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하고 히틀러의 잔당은 그것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나치당의 극우 사상을 선전했다. 그 바람에 1924년 5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나치당은 6.5퍼센트의 득표율로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옥중에서 정당 대표가 된 히틀러는 얼마 후 감형받고 출옥했다. 그리고 선거를 치를 때마다 제2 야당, 제1 야당 그리고 집권당으로 비약했다.

히틀러가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맥주홀 폭동 사건은 나치당이 도약하게 된 발판인 동시에 뼈아픈 실패의 순간이었다. 십 대 소년 헤르만은 바로 그날인 11월 8일을 거사일로 잡음으로써 히틀러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의 경고를 던지고자 했다.

헤르만의 계획은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나치 정부를 위해 일하는 대사관 직원 아무나 걸리면 정의의 이름으로 저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그와 마주친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은 라트(Ernst vom Rath)라는 외교관이었다. 그는 대사관에서도 3등 서기관에 불과했으나, 비자 업무를 담당한 것이 화근이었다. 헤르만은 비자 문제 때문에 찾아왔다면서 라트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이 더러운 독일 놈,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유대인의 이름으로 너를 응징하노라”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그를 향해 다섯 발을 발사했다. 하지만 총을 다룰 줄 모르는 소년의 어설픈 총질이 라트를 즉사시키지는 못했다. 라트는 복부에 총알 세례를 받고 혼수 상태로 병원으로 급송되었다.

그 시간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었다. 옛 동지들과 함께 맥주홀 폭동 기념식에 참가한 그는 이 소식을 보고받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주치의를 파리로 급파했다. 무슨 수를 쓰든지 살려내라는 명령과 함께. 하지만 11월 9일 밤, 라트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제3주제 수정의 밤

헤르만의 테러는 유대인 사회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을 탄압할 새로운 명분을 찾던 히틀러는 사건 직후 선전부장 괴벨스를 불러, 열일곱 살에 불과한 유대인 꼬마 놈이 해외공관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똑똑히 알리라고 명령했다. 괴벨스는 즉각 비밀경찰과 군 장성을 불러 유대인 반동분자들이 독일 사회를 향해 테러를 시작했으므로 정부 차원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튿날인 11월 9일 어둠이 깔리면서 독일의 ‘일등 시민’들은 유대인 상점으로 몰려가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상점을 파괴했다. 이때 나치 정부는 전국 경찰들에게 “가급적 폭도들을 진압하지 말 것”, “유대인 교회의 화재는 가급적 진화하지 말 것”을 지령했다. 비밀경찰(SA) 대원에게는 사복을 입고 시내로 나가 폭동을 주도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헤르만의 저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유대인을 체포할 때는 “가급적 돈 많고 나이 많은 유대인 위주로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나곤 하던 일이 독일에서 시작된 것이다.각주1)

이렇게 해서 11월 9일 저녁에서 10일 아침까지 독일 전역에서 200여 개의 유대인 교회와 묘지, 7,000여 개의 상점이 파손되었다. 그리고 유대인 3만여 명은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집단수용소에 구금되었다. 그 와중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성난 군중에 겁이 나서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밤 유대인의 상점이 밀집한 대도시에서는 파괴된 유리창이 길바닥을 가득 메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길바닥의 유리 조각들이 달빛을 받아 수정처럼 아름답게 반짝였기에 독일 사람들은 그날 밤을 ‘수정의 밤(Kristallnacht, Crystal Night)’이라고 불렀다. 깨진 유리창 값은 400만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다. 유대인 상점의 유리창은 상당수가 독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벨기에산 고급 제품이었기 때문에 피해액은 더 컸다.

한바탕 광기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 유대인 상인들은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려고 했다. 나치 정부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수정의 밤이 지나간 이틀 뒤인 11월 12일, 나치 정부는 유대인 상인들에게 적반하장식의 벌금을 부과했다. 즉, 십 대 소년의 테러로 인한 라트의 죽음과 독일 사회의 패닉 사태에 대해 유대인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거액의 벌금을 부과한 것이다. 경제부 장관 괴링이 내린 벌금액은 무려 1조 라이히스마르크였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피해액보다 많은 돈을 정부에 바쳐야만 했다.

독일 사회가 이렇게 거칠게 흘러가자 마침내 바르부르크 가문도 두 손을 들었다. 유대계인 이 가문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조국의 승리를 위해 아낌없이 전비를 지원한 국가유공자 집안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재산마저 징발당할 처지가 되자 막스 바르부르크(Max Warburg)는 당시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 이사직과 은행연합회장직을 버리고 1938년 8월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각주2)

국제사회는 나치 정권의 야만성에 진노했다. 미국은 독일 주재 대사를 소환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는 언론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침묵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나치 정부는 표면적으로는 감추어왔던 유대인에 대한 공격성을 더욱 노골화했다. 돌이켜볼 때 현대 독일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수정의 밤 사건은 전날 파리에서 벌어진 십 대 소년 헤르만의 저격에서 출발한다.각주3) 혼자의 힘으로 나치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덤빈 소년의 이름은 헤르만 그린츠판(Hermann Grynszpan)이다. 영어로는 허셀 그린스펀(Herschel Greenspan)이라 불린다.

수정의 밤 이튿날 아침의 모습. 당시 독일인들은 유대인 테러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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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의 밤이 지난 1938년 11월 10일 아침의 한 유대인 가게 앞. 히틀러의 선동에 따라 독일 전국에서 유대인 가게들이 습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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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악장 즐거움

제1주제 맨해튼 소년

수정의 밤에서 67년이 흐른 2005년 11월 9일은 유대인에게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만인의 존경과 칭송 속에서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자유메달을 앨런 그린스펀이 받음으로써 이미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유대계 미국인이 더한층 자긍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90년의 연준 역사에서 사실상 첫 유대인 의장이자 대통령에게서 자유메달을 수상한 최초의 의장이다.

앨런은 명예와 부를 함께 누린, 아주 운좋은 사람이다. 네 명의 대통령 아래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연준 의장직을 무려 18년이나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 재산도 상당하다(2000년에 언론에 알려진 재산 규모는 1,000만 달러 정도다). 역대 연준 의장 가운데 마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는 은행 지주회사를 소유 각주4) 했고, 유진 마이어(Eugine Meyer)는 『워싱턴포스트』지를 소유했다. 이런 전임자들의 재력에 비추어 보면 앨런 그린스펀의 재산은 별 것 아니지만, 그 또한 부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는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지는 않았다.

헤르만 그린츠판이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면, 앨런 그린스펀은 루마니아계 유대인이었다. 헤르만이 부모를 따라 유럽을 전전할 때 그보다 다섯 살 어린 앨런은 맨해튼 북쪽 놀이터에서 자랐다.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싱글맘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랐다. 그런 성장 환경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과 좀처럼 말을 섞지 않는 수줍은 성격이 되었다.각주5)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숫자에 밝아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학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동네에서 함께 자랐으며 훗날 백악관에서도 함께 근무하게 될 고등학교 선배 헨리 키신저가 뉴욕시립대학에 진학하면서 자기처럼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해보라고 충고했지만, 앨런은 듣지 않았다. 어릴 때 집안을 들락거린 외삼촌들한테서 어깨너머로 배운 연주 실력만 믿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세상에 뛰어들기로 했다.

그러나 열일곱의 나이(헤르만이 테러를 감행한 나이와 같다)로 전국을 누비며 밴드 활동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실력의 한계를 느끼고 더 연주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줄리어드 음대에 등록을 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연주 활동으로 돈을 버는 주독야경(晝讀夜耕)의 생활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중대 국면을 맞이한 미국은 젊은이들을 징병해서 최전선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고비에 이른 1944년 앨런도 징집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18세였던 그는 장차 군악대에서 복무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느닷없이 활동성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만났다. 청천벽력이었다. 많은 친구가 군대에 간 동안 그는 밴드 일로 돈을 벌면서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검진을 받았다. 병이 낫기만을 바라며 불안한 세월을 보내던 앨런은 좀 더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일 년 뒤 폐결핵이 나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뉴욕대학 상학부로 진로를 바꾸었다. 경제학에 크게 취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대학 회계학과가 취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옮긴 것이다. 뉴욕대학 시절 앨런은 경제학자로서의 꿈을 키우기보다는 여전히 심리학에 더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그러던 중 3학년 때 교수의 추천으로 맨해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이라는 회사에서 인턴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아직도 영업 중인 이 회사는 아주 특별한 은행이다. 오늘날 뉴욕 연준 맞은편에 있는 이 은행은 ‘상위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의 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회사의 임원(파트너)들은 거의 예일대학을 나온 알짜 부자였다. 이 회사의 설립자 에이버릴 해리먼(W. Averell Harriman)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소련 대사로 일했으며 트루먼 대통령 시절에는 상무장관을 지냈다. 이후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시절에도 여러 용무를 가지고 백악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공화당에 끈이 닿아 있는 임원도 많았다. 한마디로 이 회사는 정경유착의 화신이었다.

젊은 앨런은 이 특별한 회사에서 인턴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난생 처음 음악 이외의 활동으로 돈을 벌었다. 또한 경제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인생관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사람을 만났다. 프레스콧 부시(Prescott Bush)라는 임원이었다. 그는 나중에 코네티컷 주에서 공화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십 년간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미국에서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할아버지로 유명하다.

인턴 사원으로서 프레스콧 부시를 만난 뒤 앨런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사회 변방의 서민층에서 자란 탓에 윤택하게 살 수 있게 돈을 버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으나 뉴욕과 워싱턴 사이에 놓인 주류 사회의 은밀한 끈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워싱턴을 향한 야망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제2주제 출세 가도

앨런은 대학 졸업 후 같은 대학원에 등록하고 낮에는 경제 통계를 작성하는 민간기관 컨퍼런스 보드(Conference Board)에서 일하기로 했다.각주6) 이 기관은 미국의 산업활동지수를 작성하는 비영리기업인데, 그는 이곳에서 주급 45달러를 받고 일하면서 경제 통계에 대한 감을 익혔다. 입신출세의 꿈을 품게 된 앨런은 컬럼비아대학 박사 과정에 등록하고 이번에는 주경야독하는 생활로 바꿨다. 여기서 만난 지도 교수 아서 번스는 경기변동을 평가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의 위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특정 산업에 국한되던 앨런 그린스펀의 눈이 거시경제로 넓어졌다.

애송이 앨런이 경제 분석 업무에서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자 그의 연봉이 6,000달러로 올랐다. 최고 전문가 수준이었다. 또래 중에 그와 연봉을 경쟁할 사람들이 없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앨런은 자기가 번 돈으로 맨해튼의 좁은 아파트를 벗어나서 근교 단독주택을 샀다. 곧 이혼하기는 했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돈 버는 맛에 빠진 앨런은 지도 교수 번스(훗날 연준 의장이 되었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박사 과정을 포기했다.

앨런의 첫 부인인 조앤 미첼(Joan Mitchell)은 그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막 유명해지기 시작한 소설가 에인 랜드(Ayn Rand)의 집에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들은 미국 사회의 기둥을 이루는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철학적 배경에 관해 토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객관주의(objectivism)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념의 홍수 속에서 오직 객관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들은 인간의 이기심이야말로 가장 객관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반면 이타심, 동정심, 평등 따위는 부질없는 말장난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작은 정부, 규제철폐, 자유무역 등과 맥을 같이했다. 앨런은 미첼과 이혼한 뒤에도 이들과 어울리면서 규제철폐에 관한 신념을 키웠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모든 분야에서 정부의 개입을 지지하는 케인스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다. 심지어 1965년에는 『타임(Time)』지가 “우리 모두는 이제 케인스주의자(We are all Keynesians now)”라는 제목으로 연말 특집호를 발행할 정도였다.각주7) 이런 환경 속에서는 자유주의자인 앨런이 공직에 발을 붙이기 힘들었다. 앨런은 개별 산업 경기전망을 전문으로 하는 컨설팅 회사의 대표로서 착실하게 개인 재산을 늘려나갔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한 닉슨은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서 한동안 은인자중하다가 1967년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말없는 다수(silent majority)’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서 대선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앨런에게 접근했다. 민주당 정부의 도시개발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그의 책이 닉슨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 앨런은 닉슨 후보 정책자문단에 참가하면서 마침내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각주8)

하지만 닉슨은 대통령이 된 뒤 앨런을 찾지 않았다. 앨런이 워싱턴에 입성할 기회는 한참 뒤에야 찾아왔다. 경제적으로는 오일쇼크 여파로 미국 경제가 심한 내상을 입고 있을 때였다. 정치적으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 고압적인 태도로 국정을 운영하던 닉슨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씩 떨어져나간 뒤였다.

워터게이트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1974년 여름에 이르자 마침내 대통령 경제자문단(Council of Economic Advisers)의 의장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오래 전 닉슨 대통령 후보 캠프의 자원봉사자였던 앨런에게 제안이 들어왔다.각주9) 앨런은 그 제안을 얼른 수락했다. 하지만 출근도 하기 전에 닉슨이 사임하고 말았다.

1974년 8월 9일 대통령 전용기로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 대통령. 이 순간 미국 국민은 1962년 언론의 편파보도를 원망하며 정계 은퇴를 확언한 닉슨의 옛 모습을 상기했다. “그는 또 돌아올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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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앨런 그린스펀이 오래 꿈꾼 공직 생활은 닉슨이 아닌, 포드 대통령에게 선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정부와 규제철폐를 주장하는 객관주의자들의 세상이 열린 것을 의미했다. 앨런은 여러 방면에서 규제 철폐와 완화를 시도했다(그가 물꼬를 튼 규제완화는 카터 행정부 이후 부시 행정부까지 계속되어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조류로 굳어졌다). 하지만 당시 백악관의 최대 관심사는 규제완화보다 경기위축이었다. 실업률이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9퍼센트를 바라보고 수요가 위축된 상황에서 민주당 정부가 제안하는 조세 환급(tax rebate) 프로그램을 실시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는데,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믿을 만한 경제 통계가 없었다.

앨런은 자기가 개발한 간이 GDP 통계를 이용해 경제가 이미 회복 국면에 들었으므로 조세 환급은 필요 없다는 결론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런 과정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하는 일벌레 그린스펀의 위상이 대통령 측근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외부에서 보는 포드 행정부는 모든 면에서 “너무 늦게, 너무 조금(baby step)” 행동하는 무능한 존재로 비쳐졌다. 결국 1976년 대선에서 카터 후보가 당선되면서 앨런은 백악관을 떠나 뉴욕으로 돌아갔다. 짧은 백악관 생활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뉴욕대학 경제학 박사 학위였다.각주10)

카터 대통령하에서는 앨런이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자기 사업을 계속하는 가운데 대기업 사외이사나 민간 싱크탱크의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1980년 대통령 선거 때가 되자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 측에서 연락이 왔다. 1967년 대선 때 닉슨을 도운 것처럼, 앨런은 레이건 후보의 선거공약을 다듬는 일에 다시 참여하기로 했다. 하지만 레이건 역시 대통령이 된 뒤 앨런에게 어떠한 공직도 제의하지 않았다. 1983년 카터가 임명한 폴 볼커(Paul A. Volcker)의 임기가 만료되자 레이건은 그를 재신임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당시 볼커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너무나 두터웠기 때문이다.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 경제는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볼커가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난 1979년 10월, 10년물 국채 금리는 그동안 누적된 물가상승 압력과 이로 인한 미 달러화 약세 우려로 갑자기 연 11퍼센트를 향해 급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볼커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개최된 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신임 연준 의장으로서 국제 무대에 데뷔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금융시장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그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DC로 급거 귀국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직행한 볼커는 일정에도 없는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 그리고 페더럴펀드 금리(1일물 은행간 금리)를 연 11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무려 1퍼센트포인트나 올릴 것을 의결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통화량을 목표로 삼고 금리를 얼마든지 더 올릴 의사가 있다는 것도 함께 결정했다. 그날 저녁 방송에서는 그 소식을 전하면서 ‘새터데이 나이트 스페셜(Saturday Night Special)’이라고 했다. 이 말은 갱들이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불법 권총’을 뜻하는 은어였다. 얼마 후 페더럴펀드 금리는 13퍼센트를 돌파했고, 이듬해에는 18퍼센트를 넘어섰다. 말 그대로 ‘새터데이 나이트 스페셜’이었던 것이다.

고금리 때문에 기업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레이건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비난이 연준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결국 카터가 임명한 볼커는 레이건의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레이건은 볼커의 임기가 다가왔을 때 그를 연임시키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은 물가 관리에 성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9퍼센트가 넘는 실업률 속에서도 연임에 성공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인 1987년 여름, 볼커의 두 번째 임기가 다가왔다. 이번에도 백악관은 일차적으로 볼커의 연임을 생각했다.

하지만 볼커는 경기불황의 주범이라는 의회와 언론의 공격에 지쳤다. 게다가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G7 국가들이 엔화 강세와 달러화 약세를 약속함으로써 달러화 가치 수호를 위해 그동안 싸운 자신의 역사적 사명도 완수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임을 사양했다.각주11)

볼커가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할 뜻이 없음을 통보받은 베이커 재무장관과 리건 대통령 비서실장은 비로소 앨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앨런 그린스펀은 연준 의장직에 관심이 있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레이건은 그를 불러 이것저것을 물어본 뒤 자리를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앨런 그린스펀의 두 번째 공직생활이 시작되었다. 십 년 만에 워싱턴DC로 컴백한 것이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신임 연준 의장을 발표할 때 나란히 배석한 앨런 그린스펀(왼쪽 첫 번째)과 폴 볼커(왼쪽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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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주제 영웅 등극

일반인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앨런 그린스펀이 전임자 폴 볼커를 능가하는 세계적 뉴스메이커로 부상하는 시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취임한 지 딱 두 달 만에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금융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흔히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라고 불리는 1987년 10월 19일 미국의 주가지수(다우존스 지수)는 하루 동안 22.6퍼센트가 빠졌다. 이것은 대공황의 시작이라고 하는 1929년 10월 24일의 11퍼센트 주가하락보다 큰 것이었다. 이날의 충격은 다른 나라에까지 번져서 이튿날 홍콩 41.8퍼센트, 스페인 31퍼센트, 영국 26.5퍼센트 등 전 세계적인 주가 폭락 사태를 불러왔다.

모든 상황이 볼커 때와 비슷했다. 취임 두 달 만에 금융위기가 찾아왔을 때 앨런 역시 사무실을 떠나 텍사스 주에서 강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식시장 동향이 심상치 않자 일정을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대응 방식도 비슷했다. 원인이 프로그램 트레이딩(program trading)이라는 것이 파악되면서 주변에서는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다. 하지만 앨런은 주위의 건의를 일축하고 볼커처럼 과단성 있게 대처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월가를 향해 행동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그가 내린 결정은 닥치는 대로 국채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공개시장조작의 원칙은 단순 무식했다. “규모는 무제한! 시기는 필요할 때까지!”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최종대부자에서 최종투자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버냉키 의장이 취하고 있는 일의 전주곡이다). 이렇게 해서 사상 유례 없던 전 세계적 증시폭락 사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몇 달 뒤 주가가 예전 수준으로 돌아오는 한편, 이듬해 1사분기 경제성장률은 연 2퍼센트 수준을 회복했다. 2사분기에는 오히려 연 5퍼센트로 상승했다.

그때까지 앨런 그린스펀은 국내외적으로 별로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통화정책의 경험도 많지 않았다. 재무부와 연준에서 평생을 보낸, 엄청난 거구의 폴 볼커에 비하자면 여러 면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왜소한 체구의 앨런은 목소리도 작았다. 하지만 블랙 먼데이를 계기로 그는 일순간 전임자와 똑같은 반열에 올랐다. 연준에서 잔뼈가 굵은 도널드 콘(Donald Kohn) 비서국장을 옆에 두고 실무를 빠르게 익혀가면서 조직 장악력도 넓혔다. 그리고 훌륭한 참모인 콘을 통해 전임자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갔다.각주12) 통화주의를 포기하고 과거처럼 금리를 운용목표로 채택했다. 얼마 후에는 금리 목표 수준을 명확히 밝히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고는 한번에 0.25퍼센트포인트씩 자주 움직이는, 특유의 아기 걸음(baby step)을 연준의 새로운 스타일로 도입했다.

이런 새로운 시도를 할 때 반대하는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과거 통화주의가 절정에 올랐을 때 “금리를 운용목표로 하면 진성어음주의처럼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각주13) 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전부 침묵했다. 금리를 목표로 삼더라도 그 목표 수준을 밝히거나 방향을 예고하고 조금씩 조정하는 것은 “쏠림 현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 목소리(앨런 그린스펀의 스승인 번스 의장의 이론)도 갑자기 잦아들었다.

학계에서는 그린스펀식의 투명하고 정교한 금리 조절이야말로 모든 중앙은행이 본받아야 하는 당연한 법칙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의 이름을 ‘테일러 룰(Taylor’s rule)’이라고 붙였다. 사람들은 통화정책을 예술이 아닌 과학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통계 수치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며 조금씩 자주 바꾸는 금리정책에서 고전물리학적 인과율을 느낀 것이다.

이렇게 금리정책을 통해 입지를 확실히 굳힌 앨런 그린스펀은 자기의 소신, 즉 ‘객관주의’ 철학을 다른 분야로까지 확대해나가기 시작했다. 은행들의 수신금리 규제(금리상한선, Regulation Q)를 사실상 폐지하다시피 할 정도로 약화시켰다. 그리고 은행 채권이나 정기예금에 대한 지급준비율도 0퍼센트로 낮춤으로써 지급준비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그가 보기에 모든 규제와 정부 개입은 나쁜 것이며 중앙은행은 금리조절과 공개시장조작만으로도 얼마든지 경제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각주14)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 경제가 호황을 맞으면서 앨런 그린스펀의 명성은 점점 더 올라갔다. 냉전 체제 붕괴 이후의 고성장, 즉 평화 배당(peace dividend)도 그의 업적으로 돌아갔으며 클린턴 행정부의 자랑인 국가채무감축도 그것을 결심한 대통령보다 그것을 건의한 그의 공로로 치부되었다. 앨런 그린스펀 특유의 대단히 모호하고 현학적인 표현은 그를 살아 있는 현자로 믿게 만드는 촉매로 작용했다.

태평성대 속에서 간간이 찾아오는 금융불안은 그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벤트였다. 블랙 먼데이가 발생한 지 십 년이 흐른 1996년, 주식시장이 과열 기미를 보이자 그는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는 현학적 표현으로 투자자들을 일갈했다. 설립된 지 이 년도 되지 않은 IT기업 넷스케이프의 주가가 상장 며칠 만에 세 배씩 뛰는 현상에 대한 경고였다. 그 바람에 주식시장은 급속히 냉각하고 투자자들은 불평했지만,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해졌다.

그 무렵 비이성적 과열은 세계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앨런 그린스펀의 개인생활에도 찾아왔다. 아주 오랫동안 교제해오던 스무 살 연하의 여자와 1997년 초 마침내 재혼한 것이다(데이트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혼을 결심할 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비이성적 과열의 후유증은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한때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던 아시아의 용들은 1997년 말 외환위기라는 격랑을 만났고, 1998년에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2000년에는 미국마저 닷컴 버블 혹은 IT 버블이 꺼지면서 경기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때마다 앨런 그린스펀이 재빠르게 나서서 금리를 조절하거나 공개시장조작을 실시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그가 마치 세상의 구원자인 것처럼 느꼈다.

제4악장 슬픔

제1주제 죽음

어느 나라에서나 살인은 극형에 처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흥분을 잘하는 프랑스에서는 원한에 의한 살인에 대해 상당히 온정적이다. 오죽하면 ‘흥분죄(crime passionnel, crime of passion)’라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다. 1914년 현직 재무장관 조제프 카요(Joseph Caillaux)의 부인이 자기의 추잡한 사생활을 폭로한 피가로 신문사를 찾아가 근무 중인 편집국장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 뒤 현장범으로 잡혔을 때에도 그녀는 흥분죄로 처리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남편만 공직에서 물러났다.각주15)

히틀러의 부하 라트에게 총질을 한 17세 소년 헤르만 그린츠판의 범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범행은 불우한 개인 사정에 의한 자포자기의 성격이 강했다. 국제사회에서도 헤르만에 대한 동정이 쏟아졌다. 헤르만은 라트를 저격한 직후 프랑스 경찰에 끌려가면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니요, 나는 개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동물처럼 쫓겨다녔다”고 외쳤다. 이 말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제사회는 “어린 소년의 살의를 키운 것은 바로 나치”라고 히틀러 정권을 힐난했다.

동물 취급을 받아왔다는 17세 소년 헤르만의 처벌을 두고 프랑스 정부는 고민에 빠져 재판을 아주 무성의하고 천천히 진행했다. 그 바람에 사건이 터진 뒤 1년 반이 지나도록 재판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반면 라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를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 청소’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나치가 오히려 수세에 몰렸다. 그래서 피해자 라트 가족의 변호사를 나치 정부가 나서서 교체하고 헤르만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나치가 세운 비시(Vichy) 괴뢰정부는 나치의 거센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헤르만을 넘겼다.

아무리 잔인무도한 나치 정권과 게슈타포라고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그냥 처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치 정권은 헤르만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면서 국제사회의 감시와 관심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독일로 이송된 지 얼마 후 헤르만의 소재와 안부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그의 행방에 관한 기록들이 사라졌다. 일설에 따르면, 헤르만은 나치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5월 8일 집단수용소에서 원인 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미 히틀러가 자살(4월 30일)하고 베를린이 연합군에 함락(5월 2일)당한 후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햇빛을 볼 수 있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크게 악화된 건강 때문에 그는 광명을 찾을 수 없던 것이다.

수정의 밤을 몰고 온 헤르만 그린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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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제 수치

2001년 9·11테러사건이 터졌을 때 앨런 그린스펀은 국제결제은행(BIS) 총회 참석차 유럽에 있었다. 사건이 터진 직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를 전용 비행기로 모셔왔다. 그럴 정도로 그는 미국 경제의 아이콘이었다. 18년에 걸친 임기가 끝나갈 때가 되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삼 대에 걸쳐 자기 집안과 인연을 맺어온 그에게 자유메달을 수여했다. 메달을 수상하기 전에 부시 대통령이 밝힌 그의 업적은 그린스펀 자신의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각주16) 부시 대통령의 경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을 떠나던 날 연준 본부까지 찾아가 이임식에 참석하고 그의 고별사를 경청할 정도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앨런 그린스펀의 명성은 숱한 금융위기 돌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회고록의 제목을 『격동의 시대(Age of Turbulence)』라고 붙였다. 세계 각국의 경제 전문가와 정책입안가들은 심고원려(深考遠慮)하는 그의 지혜를 배우겠다고 앞다투어 그 책을 샀다.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그린스펀의 회고록.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 경제 전문가의 판별 기준이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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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8년 9월 리먼 사태가 터지면서 그린스펀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린스펀은 잘못된 통화정책을 통해 세계경제를 위험에 빠뜨린 주범”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퇴임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그는 리먼 사태 직후 돌연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 칩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2008년 10월 23일 하원이 마련한 청문회마저 불참할 수는 없었다. 공직에 있을 때 현란한 단어 선택과 의미심장한 은유법으로 유명한 그였지만, 그날 앨런 그린스펀의 발언은 소박하고 분명했다. 자기가 평생 경제를 다뤄왔지만, 그런 충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무지에 대한 겸손’을 토로했다.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까지 앞장서서 정책 실패에 대해 날카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그는 오랜 답변 끝에 끝내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어깨를 움츠렸다.

“은행과 같은 민간기업의 이기적 동기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저의 믿음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합니다.”각주17)

자신이 평생 간직해온 경제 철학, 즉 에인 랜드에게서 배운 객관주의 또는 극단적 자유주의(libertarianism)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누구보다 영예로운 삶을 살아온 그로서는 지울 수 없는 엄청난 수치였다.

제3주제 대단원

어린 소년 헤르만 그린츠판의 범행이 알려진 직후 유대인 원로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독일 정부가 취한 정치 선동과 폭력성을 규탄했지만, 아울러 십 대 소년 헤르만도 무책임하다고 원망했다. 몰아닥칠 후폭풍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정의 밤을 지새운 뒤 헤르만에 대한 유대인 사회의 원망은 국제사회의 평균 수준을 훨씬 넘었다.

헤르만은 진짜로 생각이 짧았다고 할 수 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헤르만의 테러는 공격할 기회만 보고 있던 나치 일당에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해 결국 홀로코스트의 출발점이 되었다.각주18) 더욱 황당한 사실은, 그가 살해한 라트야말로 진짜 나치의 적이었다는 점이다. 나치가 비록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우상화하기는 했지만, 라트는 그동안 비밀경찰에게 은밀히 내사를 받고 있었다. 반나치주의자로 의심받을 행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헤르만은 동지를 살해하고 동족을 핍박받도록 만든, 진짜 어리석은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유대 사회에서 헤르만 그린츠판을 기억하기는 하지만, 추앙하는 움직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워싱턴DC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걸린 특징 없는 사진이 그에 관한 기록의 전부다. 헤르만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의 결심과 행동이 신의 섭리(Providence)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신중함(prudence)을 몰랐다. 한마디로 어린 헤르만은 열정과 맹신의 덫에 걸린 것이다.

맹신의 덫에 걸린 것은 앨런 그린스펀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 앨런은 누구보다 열심히 에인 랜드가 주관하는 토론에 참가했다. 누군가 그녀의 저서를 비판하면, 대신 나서서 역정을 내기도 했다.각주19) 그런 관계 때문에 앨런이 포드 대통령 앞에서 임명장을 받고 선서할 때 그의 사상적 스승인 에인 랜드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앨런이 랜드에게 심취했던 것은 아마도 자기가 배운 경제학에서 느끼지 못한 인문학의 심오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회고록에도 밝혔지만, 청년 시절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논리실증주의는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견해다.

에인 랜드는 논리실증주의에 따라 실증하기 어려운 개념인 이타심, 동정심, 평등, 공익 등을 배제했다. 그 대신 실증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 발전과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 같은 것을 신봉했다. 이런 생각을 객관주의(objectivism)라고 불렀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발전과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한편 정부를 배격하는 그녀의 사상을 정치학에서는 자유주의(libertarianism)라고 불렀다. 앨런 그린스펀은 이런 사상에 심취해 공직에 있는 내내 규제완화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객관주의의 뿌리인 논리실증주의는 이를 이끈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파기했다. 이후 다른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오늘날 유럽에서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논리를 뒤집은 것은, 논리의 가장 밑바탕에는 도저히 존재를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치나 개념 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것부터 부정하기 시작하면 모든 논의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검증 가능성을 엄격하게 요구하면,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의 차이가 없어진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도 어느 정도는 실증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자기가 주장한 논리실증주의를 포기한 뒤 오히려 인간 의식에서 모호함의 출발과 경계를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각주20) 철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은 에인 랜드와 앨런 그린스펀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한때 가진 생각에 잘못 매달린 것이다.

1974년 8월 앨런 그린스펀(가운데)이 경제자문단(CEA) 의장 임명장을 받은 뒤 대통령 집무실에서 찍은 사진. 친어머니(맨 왼쪽)와 제럴드 포드 대통령(왼쪽 두 번째), 에인 랜드 부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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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실증주의에서 비롯된 에인 랜드의 잘못된 철학은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에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로 나선 론 폴(Ron Paul) 의원은 ‘연준 폐쇄(End the Fed)’를 자신의 대선 슬로건으로 삼았다. 연준의 음모를 타파하고 금본위제도로 복귀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인간의 이기심에 기초를 둔 자유경쟁 시스템을 믿는 대신 연방 정부를 불신하는 그는 해외에 파병된 미군도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의 정치철학이 젊은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Atlas Shrugged)』에서 기인한다고 밝힌다. 앨런 그린스펀과 똑같다. 대공황이 끝나던 무렵, 가난한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의사 자격증을 따고 자수성가했다는 점도 그린스펀과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린스펀은 지금 후회하지만, 론 폴은 아직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2009년 미국에서 시작된 티파티 운동 참가자 중에서는 론 폴과 같은 사람이 많다. 러시아의 붉은혁명과 냉전 시대 미국의 매카시 선풍을 겪은 에인 랜드의 지독한 정부 불신과 자유방임주의 사상이 아직도 창궐하는 것이다. 생각이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네 프랑크(1929~1945)는 그녀가 남긴 일기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건물 안에 숨어 살던 그녀가 열세 번째 생일날 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기록을 남기기 훨씬 이전부터 독일 사회에서는 유대인들의 숨통이 조여지고 있었다. 유럽을 전전한 헤르만 그린츠판은 비슷한 또래의 안네 프랑크보다 먼저 그리고 가혹하게 희생당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 그가 ‘신의 섭리’에 대해 가졌던 믿음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단독 테러는 홀로코스트를 앞당기고 수정의 밤을 초래함으로써 동족에게 엄청난 비극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미국의 앨런 그린스펀은 유럽의 헤르만 그린츠판에 비해 훨씬 이성적이고 노회했지만 그의 믿음도 헛되기는 마찬가지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비용을 초래했다. 2008년 10월 청문회장에서 축 처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보고 미국인들은 “어깨를 움츠린 앨런(Alan Shrugged)”이라고 했다. 이는 에인 랜드의 『어깨를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의 패러디다. 이후 앨런 그린스펀은 좀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있다. 지금도 그는 워싱턴DC에 있는 개인 사무실로 출근하는데, 간혹 길거리에서 오가다 마주치며 보게 되는 그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무척 노쇠해 보인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다니는 것 같아 측은하기도 하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출발하는 자유경쟁 시장이 모든 경제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믿은 객관주의자 또는 신자유주의자의 현 주소라고 보인다. 평범한 진리지만, 얕은 지식에서 출발하는 잘못된 신념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각주21)

의회에서 어깨가 처진 채 증언하는 앨런 그린스펀. ‘글로벌 경제 안정’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받은 그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책임을 추궁받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헨리 왁스먼 위원장이 “당신의 세계관이나 이념이 틀렸으며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까”라고 묻자 그린스펀은 “물론입니다. 지난 40년 이상 제 생각이 옳다는 증거들을 통해 확신을 가졌었지만, 금융위기가 터졌으니 저는 놀랄 뿐입니다”고 멋쩍게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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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인간성

이 글에서는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의 경제철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회고록을 되짚어보면서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회고록 54쪽부터 59쪽까지 닉슨에 대해서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가 사임할 때 홀가분해졌다”고 술회하는 한편, 닉슨의 인격에 관해서는 “어떻게 한 사람의 앞뒤가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놀랐다”라고도 했다.각주22)

자신을 믿고 발탁한 대통령의 몰락 뒤에서 대통령의 인격을 험담하는 앨런의 이런 태도야말로 닉슨 이상으로 위선적이라고 보인다. 그의 말대로라면, 닉슨의 내면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히 가깝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닉슨이 유대인을 싫어했다”는 비판에 대해 “모르시는 말씀. 그는 유대인만 싫어한 것이 아니라 이태리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동구 사람도 전부 싫어했지요. 도대체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나 했는지 모르겠어요. 죄다 미워했으니까요”라며 한술 더 떴다.각주23) 그런 대목에서 앨런 그린스펀의 인간성이 참으로 초라하다고 느꼈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붙인 제목처럼 “경제가 정치를 만나기 위해(Economics Meet Politics)” 앨런 그린스펀이 오히려 닉슨을 이용했다고 보인다.

한편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차라리 침묵하면 좋았을 것을, 2010년 4월 브루킹스 연구소를 통해 앨런 그린스펀이 발표한 논문(「The Crisis」)은 읽기가 민망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제 고문을 지낸 하버드대학의 맨큐(N. Gregory Mankiw) 교수는 그 논문에서 대단한 통찰력을 느꼈다고 평가했지만, 어떤 부분이 그런지에 대해 동의하기 힘들다. 철저한 자기 변명과 일방적인 주장만 가득하다. 리먼 사태 직후인 2008년 10월 23일 하원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역겨운 처신과 다르지 않다.

그날 앨런 그린스펀은 모기지 시장 규제실패의 책임을 묻는 하원의원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가 현직에 있을 때 긴밀히 대책을 의논했다고 밝힌 사람이 그램릭(Edward Gramlich) 연준 위원이었는데, 그는 이미 몇 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까지 들먹이며 둘러대는 모습에 대해서는 『워싱턴포스트』도 싸늘하게 평가했다(「Who found the flaw?」, 2008년 10월 24일자).

앨런 그린스펀의 언행을 종합해볼 때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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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집필자 소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Wharton School)을 졸업하고 1985년부터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2007), 『머니 맨』(2008)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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