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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금은행은 1947년 6월 16일 미 군정청이 제정한 ‘조선환금은행의 창립’(군정법령 제145호)이라는 법규에 따라 미 군정청이 조선은행에서 2억 원을 차입해 설립한 기관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47년 6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1년 반 동안만 활동한 이 은행은 지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직원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미 군정청 소속의 작은 행정기구였기 때문에 사방팔방에서 모인 직원들은 소속감도 크지 않았다. 그나마 조선은행에 흡수되어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은행 관계자로 거의 유일하게 기록된 김진형 부총재의 행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오늘날 산업은행의 전신인 조선식산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미 군정청이 조선환금은행을 세우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제시대 때 외환을 다뤄본 경험이 있는 외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외환 전문가로서 그의 가장 큰 공로는 환율을 현실화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식 환율은 미 군정청이 광복 직후 엉겁결에 정한 1달러당 15원이었다. 도저히 지켜질 수 없었던 이 환율은 이후 1달러당 50원으로 뛰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 조선환금은행은 외환의 자유매매제를 실험적으로 실시했다. 그랬더니 환율은 공정환율의 열 배가 넘는 1달러당 850원까지 뛰었다. 정계와 재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수입 국가에서 환율을 이렇게 올려놓으면 경제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못마땅하게 여겨 김도연 재무장관을 불러 호되게 꾸중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이 참고가 되어서 훗날 ‘한미간 환율에 관한 잠정협정’에서는 1달러당 450원의 환율이 책정되었다. 시세의 절반 수준이었지만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로서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은 수입품을 값싸게 소비하기 위해 자국 통화를 고평가하는 포퓰리즘을 구사한다. 그래서 후진국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초창기의 금융 엘리트들은 대통령의 꾸지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있었다.각주1) 모진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한국 경제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이런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진형 조선환금은행 부총재는 1948년 실시된 외환 자유매매제의 실무책임자였다.
이후 김진형은 한국은행 이사를 거쳐 1956년에 제3대 한국은행 총재로 취임했다(금융인 김진형은 미국을 향한 최빈국 대통령의 오기 항목에서 소개한 금융인 장기영과 조선은행 안에서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4·19혁명 직후 진행된 과거청산 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 한국은행을 떠났다. 3·15부정선거와 관련해서 부당 대출한 책임을 지고 김영휘 수석 부총재와 배재인 부총재 등과 함께 구속된 것이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야인으로 지내던 김진형은 1967년 주식회사 한국개발금융을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다시 금융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1970년대 들어서 정부가 사금융 양성화 차원에서 단기자금회사(단자회사)를 설립키로 하자 한국개발금융(주)은 최초의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주)을 자회사로 설립했다. 한국투자금융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충청은행과 보람은행, 서울은행 등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하나은행으로 발전했다. 반면 한국투자금융의 모회사인 한국개발금융은 1979년 장기신용은행으로 변모했지만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민은행에 흡수합병되고 말았다. 모회사와 자회사의 운명이 엇갈린 것이다.
똑같이 김진형 사장이 세운 한국투자금융과 장기신용은행의 엇갈린 운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 한낱 단기자금회사에서 출발한 한국투자금융이 굴지의 은행으로 발전하고, 특별법으로 세워진 장기신용은행이 스러진 이유가 직원들의 능력이 달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두 조직의 차이는 경쟁의 유무였다. 30여 개의 단자회사끼리 각축을 벌이면서 살아가는 것과 정부가 만들어준 보호막을 두르고 진입 장벽 속에서 편안하게 영업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의 금융 규제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감독 당국의 규제를 대가로 한 특별한 보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오늘 부실한 금융기관 하나를 연명시키는 것은 내일 건실한 금융기관 하나의 탄생을 가로막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라는 월터 배젓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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