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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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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출발

아주 오랜 옛날, 오늘날의 터키 서쪽에 리디아(Lydia)라는 나라가 있었다. 에게 해의 온화한 기후 덕분으로 각종 곡물, 과일, 견과류가 풍부했던 곳이다. 그로 인해 상업도 꽤 발달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리디아 사람들이 (서양 역사에서) 최초로 상설 상점을 세웠다고 한다. 한편, 리디아에는 팩톨러스(Pactolus)라는 강이 흘렀는데, 여기에는 금(사금)도 많았다. 그리스신화에서 미다스 왕이 자신의 손을 씻은 곳이 이 강이다.

당시에는 금이든 은이든 장식용으로만 쓰였다. 이런 상태에서 상업이 발달한 리디아에서 놀라운 발명을 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주변 나라들과 장사하는 데 불편을 없애기 위해 주화를 만든 것이다. 종류별로 품질과 규격이 일정하고 그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오늘날의 주화와 똑같았다.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그런 발명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리디아 사람들이 주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경이었고, 그 이름은 일렉트럼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금속 정련 기술이 부족하여 일렉트럼은 금과 은이 섞인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한편 기원전 4세기 초 리디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렉트럼의 편리함을 깨닫고 돌아와 마케도니아의 금속 기술을 이용해 은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기술로는 금보다 은을 추출하기가 훨씬 힘들었기 때문에 은이 더 귀한 금속이었다.각주1) 아테네 지역의 라우리움(Laurium)은 지금도 상당한 유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커다란 은광이 있었는데 여기서 생산된 은화를 아젠툼(argentum)이라고 불렀다.각주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아젠툼이 알려지면서 화폐경제가 지중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은화는 아주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1492년 신대륙 발견 이전까지 그리스나 동유럽(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생산된 은으로 만든 돈은 유럽 대륙에서 일상생활용 주화였다.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일반 서민은 죽을 때까지 금화를 쓸 일이 없었다.

금화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제국까지 정복(기원전 333년)한 이후 부자들의 돈으로 이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리품으로 약탈한 금을 그리스로 유입시켜 장군들에게 나눠주었다. 금화가 좀 더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다. 포에니전쟁각주3) 을 통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북아프리카와 포르투갈 지역에서 금을 채취해 솔리두스(solidus)라는 금화를 만들었다. 이 돈은 지중해 전역에서 국제통화로 자리 잡았다(원시 형태의 금본위제도). 오늘날의 미 달러화와 비슷한 지위였다.

고대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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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동쪽에서 금이 일부 생산되기는 했지만 유럽에서 필요로 하는 금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생산되었다. 오늘날 황금해안(Gold Coast)라고 불리는 가나 근처였다. 여기서 생산된 금은 육로를 통해 지금의 카이로 지역까지 운송되어 소금과 교환되었다. 소금은 무더운 아프리카에서 고기를 저장하기 위한 생필품이었다. 소금을 구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그야말로 소금이 금값이어서 금과 소금의 교환 비율(무게 기준)이 일대일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날씨 좋은 지중해에서 소금을 만들어 북아프리카의 카이로에서 금과 교환했다.각주4) 이렇게 해서 사하라 사막을 관통해 유럽에 유입된 금은 일상생활에서보다는 거래 단위가 훨씬 큰 국제무역에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상당량의 금은 진기한 사치품을 사기 위해 유럽 밖으로 유출되었다.

금과 교환되던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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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든 은화든 화폐경제에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돈의 가치다. 이 문제에 대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리스는 무역수지나 재정사정에 관계없이 돈의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전쟁과 같은 긴급 상황에서도 돈의 가치를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 지역에서 발견되는 주화의 품질은 일정하다.

반면, 로마의 통치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돈의 가치를 계속 낮췄다.각주5) 은화 데나리우스(denarius)를 살펴보면 원래 4그램 정도였는데 네로 시대에 이르러서는 3.8그램으로 줄었고 왕정 말기에는 은의 함량이 2퍼센트 정도까지 하락했다. 그 정도라면 은화라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오늘날 로마 시대의 돈이라고 하는 유물들은 시대에 따라 은의 함량이 천차만별이다.각주6)

기만

돈의 가치를 지키는 데 있어서 이 세상에는 그리스가 아닌 로마의 후예가 훨씬 많았다. 화폐경제가 시작된 이래로 무수한 사람이 돈을 위조하거나 함량을 속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이처럼 돈의 물리적 가치를 낮추는 조작을 ‘디베이스먼트(debasement)’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알려진 대표적인 디베이스먼트 기술은 ‘클리핑(clipping)’과 ‘스웨팅(sweating)’이다. 클리핑은 주화의 주변을 살살 깎아내는 방법이고, 스웨팅은 주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금화나 은화 가루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클리핑 여부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주화 테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었다. 스웨팅을 막기 위해서 이탈리아에서는 금전거래가 끝나면 금화를 곧장 주머니에 넣고 밀봉한 다음, 주머니까지 통째로 주고받았다. 이탈리아어로 품질보증을 뜻하는 ‘피오리노 디 수겔로(fiorino di suggello)’는 ‘밀봉된 금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돈의 가치를 속여 불로소득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디베이스먼트의 폐해를 진저리나게 경험한 영국에서는 1690년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와 그 딸을 ‘은화 40개를 고의적으로 작게 깎았다’는 혐의로 체포해 처형했다. 유사 수법을 쓰려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아버지는 교수형에 처한 뒤 그 시체를 물에 담갔다가 토막을 냈고, 그 딸은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졌다.

디베이스먼트를 근절하기 위해 이렇게 끔찍한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돈의 가치를 속인 사람들은 주로 군주 그들 자신이었다.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이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고, 그 이후에 유럽 각 지역에서 군주들이 로마를 흉내냈다. 종교개혁 이후 교황청의 힘이 약해지면서 상대적으로 힘이 커진 군주들은 흥청망청 돈을 쓰기 바빴고, 씀씀이를 메우는 방법으로 디베이스먼트를 시도했다. 자신들의 얼굴이 새겨진 돈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렸으니, 문자 그대로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었다.

백년전쟁(1337~1453) 기간에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 왕실은 여러 번에 걸쳐 디베이스먼트를 시도했다. 기나긴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왕을 자처하는 영국의 헨리 5세의 도전을,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은 샤를 7세가 극적으로 물리치고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샤를 7세의 인생은 아주 고단했다. 친어머니인 이자보 왕비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신이상이 있던 남편 샤를 6세를 대신해서 프랑스 국정을 좌지우지했는데, 남편이 죽은 뒤에는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해 영국과 내통하면서 외국의 국정까지 참견하려고 했다. 그런데 친아들인 샤를이 말을 듣지 않자 “그놈은 내가 영국인과 바람피워서 낳은 자식”이라고 떠벌리면서 아들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남편을 능멸하고 혼외정사하는 데 있어 프랑스의 이자보는 러시아의 여왕 예카테리나 2세와 쌍벽을 이룬다).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는 바람에 샤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세금은 걷히지 않았다. 결국 디베이스먼트에 의존하면서 돈의 가치는 그 이전의 35분의 1로 줄어들었다(15세기 초).

서양 역사에서 디베이스먼트로 가장 큰 악명을 얻은 왕은 영국의 헨리 8세다. 그는 부모에게서 받은 엄청난 유산을 다 까먹고도 모자라 여러 차례 돈의 함량을 속이는 방법으로 급전을 조달했다. 헨리 8세의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Thomas Gresham)은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을 때 늙은 몸을 이끌고 찾아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면서 아버지의 악정이 남긴 악화(惡貨)를 거둬줄 것을 당부했다.각주7)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위 3년차인 1561년, 마침내 악화를 거둬들여 새 돈을 만들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 가치와 액면가치의 차이를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새 돈으로 바꾸는 비용까지 지급해야 했기 때문에 악화를 들고 찾아가는 사람이 적었다.

뚱보 왕으로 유명한 헨리 8세. 형수를 포함해 여섯 여자와 결혼하고 두 부인을 처형한 기행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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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튜더 왕조가 남긴 악화는 스튜어트 왕조까지 계속 유통되면서 백성들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던 끝에 1688년 명예혁명이 발생하고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오렌지공 윌리엄과 메리 부부왕은 영국 땅에서 악화를 몰아내기로 굳게 결심했다. 클리핑을 한 토머스 로저스 부녀를 잡아서 능지처참한 것은 그런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명예혁명 이후 등장한 인류 최초의 시민 정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엘리자베스 여왕도 하지 못했던 화폐개혁을 성공시켰다. 1694년 영란은행을 세우고 이 기관에 정부의 은행 겸 발권기관 역할을 맡겼다. 이어서 왕실 학술원장을 맡고 있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을 1696년 왕실 조폐청(Royal Mint)의 대표로 임명하고 영란은행과 함께 위조하기 힘든 새로운 주화를 발행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불량 주화로 인한 손해를 정부가 부담키로 했다. 그럼으로써 영국은 마침내 디베이스먼트의 긴 악령에서 해방되었다(1696년 대주조, Great Recoinage).

유레카!

포토시의 모습. 소설 『돈키호테』에 “포토시처럼 부유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이 지역은 번영의 상징이었으나, 19세기 이후로는 중남미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엘 콘도르 파사’의 구슬픈 운율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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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베이스먼트는 분명히 의도적인 사기요 기만이다. 그러나 디베이스먼트와 똑같이 돈의 물리적 가치를 낮추었으면서도 전혀 이런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 있다. 바로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진행된 지리상의 발견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시절,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채굴된 금을 육로를 통해 동쪽으로 끌고 올 수밖에 없던 것은 적도 근처에서 부는 강한 무역풍 때문이었다. 당시 항해 기술로는 멀리 갈 수도 없었고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황금을 싣고 북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했다.

그러나 항해 기술의 발전과 나침반의 도움에 힘입어 포르투갈이 마침내 아프리카 서해안을 왕복하는 데 성공했다(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탐험). 이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의 풍부한 금과 면화를 유럽으로 들여왔다(또한 이때부터 면화를 대량 생산하기 위한 대농장이 개척되면서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스페인은 금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직항로를 찾아 나섰다. 국운을 건 탐험이었다.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는 100여 일간의 항해일지에 금이라는 단어를 65회나 언급할 정도로 황금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492년 그가 밟은 땅은 인도가 아니었고 금도 없었다.

그런데 1545년 오늘날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í)라는 곳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럽 전체의 매장량보다 훨씬 많은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다만 해발 4,000미터가 넘은 고지에서 캐낸 원석을 유럽으로 운반하는 것이 문제였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부에노스아이레스항까지 옮기는 데 두 달 반이 걸리고, 제일 가까운 태평양의 리마 항구까지도 2,400킬로미터였다. 따라서 신대륙에서 반드시 은의 정제를 마치고 완제품을 수송해야 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스페인은 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우앙카벨리카(Huancavelica)에서 은의 정제에 꼭 필요한 수은을 마침내 찾아냈다(1563년).

이때부터 포토시는 300년 동안 전 세계에 은화를 공급하는 공장 역할을 했다. 연간 300톤의 은이 생산되어 그 가운데 절반은 유럽으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운송되어 중국의 비단이나 차와 교환되었다.각주8) 고산지대에서 이만큼 은을 캐내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어린아이까지 동원해도 노동력은 늘 부족했고 중금속에 노출된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원주민은 끊임없이 죽어나갔다. 인구가 계속 줄자 아프리카에서 노예까지 동원되었다. 은광의 발견이 유럽인에게는 횡재요 단꿈이었지만, 인류사적으로는 저주요 악몽이었다.

유럽인에게도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은이 넘쳐남에 따라 수천 년 동안 안정되어온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한 것이다. 스페인과 아무 연관이 없는 유럽의 구석구석까지 일상생활에 일대 혼란이 초래되었다. 은광의 발견 이후 약 100여 년간 지속된 물가상승 현상을 역사에서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한다. 지리상의 발견이 가져다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부산물이었다.

화폐수량설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가격혁명은 지나치게 사실을 미화하는 이름이다. 아메리칸 인디오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눈물이나 유럽 서민들의 생활고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사건의 과정을 생각하면 ‘양심의 타락(moral hazard)’이라고 불러야 하며, 결과를 생각하면 ‘돈 가치의 타락(value hazard)’이라고 불러야 한다.

돈 가치의 타락은 돈이 태어날 때부터 걱정되던 문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에서 금화를 들여오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돈을 지나치게 풀면 생필품에서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가격이 뛰어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그때마다 휘하 장수들이 전리품을 요구하는데, 약탈한 물건을 꼭꼭 숨겨두다가는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마지못해 전리품을 배분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부하들에게 인색한 편이었다. 이것이 그의 사후에 대제국이 빠르게 분열하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아메리칸 인디오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광산 막장 생활. 이런 비극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가격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럽인의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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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의 원조라고 보기도 한다. 화폐수량설이란, 돈이 너무 많아지면 반드시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군주들의 디베이스먼트로 초래된 돈 가치의 하락은 화폐수량설의 좋은 사례다.

근대적 의미의 화폐수량설은 가격혁명 때문에 탄생했다. 절대군주들이 디베이스먼트를 한창 저지르던 시절, 많은 사람이 국왕을 원망했다. 이때 프랑스의 보댕(Jean Bodin)은 세상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법률뿐만 아니라 신학, 철학, 정치, 역사,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문사철(文史哲)의 대가였던 그는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는 은의 양과 물가 간의 관계를 주목했다. 포토시에서 은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이상, 유럽 전역에서 빚어지는 물가 불안을 국왕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화폐수량설로 가격혁명을 설명하는 그림.돈의 양과 물가 수준이 거의 함께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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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보댕이 내세운 화폐수량설은 세계경제의 고비마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공황 때는 지나친 통화긴축이 물가하락과 생산위축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피셔(Iving Fisher)가 화폐수량설을 제기했으며, 1970년대의 고물가 시대에는 지나친 통화남발이 세계적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면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화폐수량설을 부활시켰다. 시대의 고통을 화폐로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화폐수량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돈의 양이 왜 늘거나 줄었는지 살피지 않고 막연히 ‘돈이 풀리면 물가가 뛰더라’하고 주장하는 것은 ‘구름이 많으면 비가 오더라’는 식의 어설픈 일기예보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휘청거리는 속에서 돈의 가치만 따지는 것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포함한 옛날 그리스인이 하던 걱정과 같다. 이렇게 돈의 가치만 따지게 되면, 사상 유례없는 절체절명의 경제난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장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돈의 가치에 관한 약속을 저버리면, 로마의 네로 황제나 영국의 헨리 8세와 다를 것이 없다. 돈의 가치는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화폐수량설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길을 걸을 것인가, 헨리 8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결국 세상과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통화정책의 관건은 반듯하면서도 따스한 철학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의도된 돈의 타락(디베이스먼트)과 의도되지 않은 돈의 타락(가격혁명)을 모두 경험한 끝에 인류는 잠정적 결론에 이르렀다. 반듯하면서도 따스한 철학을 가진 전문가들이 권력자들에서 한걸음 떨어져서 긴 안목으로 토론을 통해 돈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하는 원칙이다. 중앙은행제도에 담긴 이런 지혜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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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집필자 소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Wharton School)을 졸업하고 1985년부터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2007), 『머니 맨』(2008)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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