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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비전

왜 갈등 상황에서 몰입은 위험한가?

터널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이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주의 맹시로 인해 생긴다. 특히 갈등상황에서 몰입할 경우 터널 비전으로 인해 균형을 잃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터널 비전

터널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이다.

ⓒ Скампецкий/wikipedia | CC BY 3.0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로 인해 생기는 문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터널 비전(tunnel vision)'이다. '터널 시야'라고도 한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영화관에 들어가 자기 자리를 찾을 때 아는 사람을 쉽게 지나친다거나 누군가 머리 모양을 바꾸고 나타나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바로 '터널 비전' 탓이다.

데이비드 맥레이니(David McRaney)는 '무주의 맹시'는 '터널 비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보여주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뭔가에 집중하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열쇠 구멍만큼 좁아지지만 편안한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만큼 시야가 넓어지진 않는다. 당신은 보통 주변을 무시하거나 뭔가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한다."

터널 비전은 비유적으로도 많이 쓰인다. 즉,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메시지의 일부분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가리켜 터널 비전이라고 한다. 사람이 흥분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고 주의력과 정보처리 능력이 급격히 저하되는 것, 재판에서 2심이 밝힌 무죄 근거를 1심은 보지 못하는 것 등은 모두 터널 비전 탓이다.

몰입은 축복일 수 있다. 자연, 사물, 일 등에 몰입하는 것만큼 재미있고 유익한 게 또 있을까.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몰입은 축복일 수 있지만 재앙일 수도 있다. 스토킹은 바로 몰입의 산물이다. 인터넷시대의 '빠' 문화와 '까' 문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갈등 상황에서 몰입은 자해(自害)를 초래하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몰입은 무엇보다도 균형 감각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디팩 맬호트라(Deepak Malhotra)와 맥스 베이저먼(Max H. Bazerman)은 『협상 천재(Negotiation Genius)』(2007)에서 '경쟁의식 각성(competitive arousal)'과 그에 따른 '비합리적 몰입 강화(nonrational escalation of commitment)'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경쟁의식을 높이는 상호작용은 당사자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기고 말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켜 결국 자해(自害)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현실 세계에서는 비합리적 몰입 강화가 자주 일어난다. 양육권 싸움, 파업, 합작사업 청산, 입찰경쟁, 소송, 가격전쟁, 인종갈등, 그 밖의 수많은 분쟁들이 순식간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강화 요인들, 즉 승리에 대한 희망과 초기 전략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욕구, 상대방을 이기고자 하는 욕망 등이 결합하면 종종 상식은 저 멀리로 날아가버린다."

물론 몰입에 의한 터널 비전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지식인은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터널 비전을 가질 때에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예컨대,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이란 불후의 명작을 쓴 환경운동 선구자 레이철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은 복잡한 세계 전체를 제쳐놓고 자기한테 흥미 있는 극히 일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드문 능력을 가졌다. 옆을 보지 않는 이런 유의 편협한 사고야말로 카슨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었는데, 바로 그 덕분에 『침묵의 봄』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편협한 시각 때문에 카슨은 나치 독일을 흠모한 영국 작가 헨리 윌리엄슨(Henry W. Williamson, 1895~1977)을 추앙하기도 했다.

터널 비전은 지식인 개인에겐 명암(明暗)이 있겠지만,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에 이르러선 암(暗)이 두드러진다.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의 뇌·신경 심리학자인 이안 로버트슨(Ian Robertson, 1951~)은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맞는 말이다. 권력은 매우 파워풀한 약물이다(Power is a very powerful drug). 인간의 뇌에는 '보상 네트워크'라는 것이 있다. 뇌에서 좋은 느낌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권력을 잡게 되면 이 부분이 작동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스토스테론이란 남성호르몬을 분출시키고, 그것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 분출을 촉진해 보상 네트워크를 움직인다. 그래서 사람을 더 과감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한다. 권력은 항우울제다. 또 도파민은 좌뇌 전두엽을 촉진해 권력을 쥔 사람을 좀더 스마트하고, 집중력 있고, 전략적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나친 권력은 코카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중독이 된다는 얘기다.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너무 많은 도파민이 분출된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터널처럼 아주 좁은 시야를 갖게 하며, 오직 목표 달성이란 열매를 향해서만 돌진하게 된다. 인간을 자기애에 빠지게 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오승주는 터널 비전을 진보 개혁 세력의 문제에까지 연결시킨다. "진보 개혁 세력이 음미할 만한 대표적인 편향은 '무엇에 지나치게 열심히 집중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이 멀게 되는' 현상이다.……혹시 진보 개혁 세력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데는 게으르고, 장밋빛 꿈에 부풀었거나 유권자가 공감하지 않는 어떤 가치에 지나치게 몰입하지는 않았을까."

주변에서 오랜 기간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겪어본 적이 있다면, 우리 인간의 균형 감각이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걸 절감했을 것이다. 다른 모든 면에선 대단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싸움에 휘말려들어 몰입하게 되면 전혀 딴 사람이 된다. 가장 먼저 역지사지(易地思之) 능력을 잃는다. 상대편의 언행은 무조건 악의적으로 해석한다. 사람이 오랜 싸움을 하면 정신이 피폐해진다는 건 바로 그 점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른바 '분노→증오→숭배'의 법칙이란 게 있다. 처음엔 정당한 분노였을지라도 그 정도가 심해지면 증오로 바뀌고 증오가 무르익으면 증오의 대상을 숭배하게 된다. 싸움을 하는 상대편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냥 잠자코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일조차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상대편에 대한 몰입으로 인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즉, 터널 비전이 작동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A가 B의 말을 왜곡했다고 가정해보자. B가 그 왜곡에 몰입하게 되면 진도를 나가기 어려워진다. 시청자는 B의 항변이 타당하다고 인정할망정 B가 느끼는 분노에까지 공감하진 않는다. 아니 공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시청자가 원하는 건 좋은 내용의 토론이지 토론자들의 인격에 대한 품평이 아니다. 그럼에도 B가 토론 내내 A의 왜곡을 질타하면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시청자는 짜증을 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럼에도 B가 그런 분노의 와중에서 내놓은 발언의 품질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게 옳겠지만, 그건 실제론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B가 A에 대한 공격에 몰입한 나머지 책임지기 어렵거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발언들을 남발했다면, 더욱 그렇다.

싸움이 치열할수록 몰입은 '자기 성찰'을 원천봉쇄한다. 몰입은 상대편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져 상대편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신의 허물은 사소하게 여기는 심리를 낳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몰입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갈등 상황에서몰입은 터널 비전을 초래함으로써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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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Tunnel vision」, 『Wikipedia』.
  • ・ 데이비드 맥레이니(David McRaney), 박인균 옮김, 『착각의 심리학』(추수밭, 2011/2012), 220쪽.
  • ・ 송관재, 『생활속의 심리학』(학문사, 2000), 245쪽.
  • ・ 제갈태일, 「식상한 일들」, 『경북일보』, 2012년 10월 16일.
  • ・ 정은주, 「무죄추정의 원칙 유죄추정의 덫」, 『한겨레21』, 제956호(2013년 4월 15일).
  • ・ 디팩 맬호트라(Deepak Malhotra)·맥스 베이저먼(Max H. Bazerman), 안진환 옮김, 『협상 천재』(웅진지식하우스, 2007/2008), 170~171쪽.
  • ・ 김종목, 「[책과 삶] '침묵의 봄'으로 유명한 환경운동 선구자 카슨의 일대기」, 『경향신문』, 2014년 4월 12일.
  • ・ 최원석, 「[Weekly BIZ] [7 Questions] "권력 잡으면 腦가 변해…터널처럼 시야 좁아져 獨走할 가능성 커져"」, 『조선일보』, 2014년 7월 5일.
  • ・ 오승주, 「유권자가 야속해? 이거 보면 달라진다: 대니얼 카너먼의 '행동경제학'으로 바라본 4·11 총선 결과」, 『오마이뉴스』, 2012년 4월 13일.

강준만 집필자 소개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사회에 의미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 대표 저서로는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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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문법 | 저자강준만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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